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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병용 변호사가 김원치 대검 형사부장이 검찰 게시판에 올린 글을 읽고 오마이뉴스에 보내온 글입니다...<편집자 주>


어제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 검사님께서 글을 써서 검찰게시판에 올렸다더군요. 바쁜 일상에 젖어 사느라 신문도 못 보았는데 어느 일간지에서는 김 검사님이 쓴 글이 인용되어 보도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녁 늦게 업무를 마치고 인터넷에 떠 있는 김 검사님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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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검찰청 검사실에서 처음 김 검사님을 만난 이후 18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 검사님은 저 끝 대척점에 서있다는 생각에 묘한 분노와 슬픔을 느낍니다. 달라진 것이라면, 그 '옛날' 김 검사님은 서슬 푸른 칼을 차고 포승에 묶인 저와 마주 대하였지만 지금 김 검사님은 커다란 흐름에 떠밀리지 않으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고, 저는 사무실에 앉아 부끄럽게도 변호사의 바쁜 일상에 젖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김 검사님이 지금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칼을 휘두르는 권력자로 서 있고, 제가 젊은 열정 이외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대학생으로 서 있다면, 이 글을 쓰는 제 마음이 훨씬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끈 떨어진 연처럼 휘청거리는 김 검사님에게 이 글을 쓰는 제 마음은 왠지 편하지가 않습니다. 저나 저와 같이 대학 시절을 보냈던 많은 동세대인들은 불의한 강자에게는 한없이 강하려고 하였지만, 힘없는 약자에게는 한없는 동정을 느끼는 '이상한'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흔히 386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들이 한 시대를 겪으면서 가지게된 공감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우리 국민들의 피와 희생 위에 세워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 하에서도 김 검사님은 여전히 '높으신' 분으로 살아 남아 우리를 '모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김 검사님의 글 속에는 권력자의 독선과 오만, 자기의 과거를 성찰하지 못하는 위선과 기만이 너무 진하게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 검사님과 진실로 참회와 화해로써 새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한가닥 바람 때문입니다.

김 검사님은 글에서 지난 28년간의 검사생활을 돌이키면서 '한 점 부끄럼 없는 공인의 삶'을 운위하였습니다. 김 검사님 스스로는 '검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김 검사님은 그 어두운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기생하여 검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 공인의 삶을 스스로 '자부'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김 검사님의 이 말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정의'를 내던져 버린 일그러진 공직자 상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위선'과 '자기 최면'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던 일제시대 어느 저항시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가슴이 시릴 만큼 되돌아보았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일 겁니다. 저는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우리사회에서 '김 검사님의 28년간 검사생활'과 '한 점 부끄럼 없는 공인의 삶'을 결코 연결지을 수가 없습니다.

김 검사님의 공직자상과 검찰상은, 검찰100년사를 운운한 대목에서 무서울 만큼 빛을 발합니다. 물론 김 검사님께서 일제 시대의 치욕스러운 검찰사를 우리 검찰의 전통이라고 강변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김 검사님이 한 말 속에서 이런 가공할 생각이 떠오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기라도 한다면 김 검사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검찰 본연의 임무"를 주장하며 맡겨진 '소명'을 다 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한 점 부끄럼 없는 공인의 삶'을 운위한 김 검사님의 글과, 유신에서 5공으로 이어진 군사정부하에서 무수한 학생들을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으로 구속하던 김 검사님의 과거 행적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이런 기우가 진실일 것이라는 무서운 전율을 느낍니다.

그리고, 김 검사님은 "이 땅에서 공산주의를 막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 노력했던 검사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 글을 읽으면서 헛웃음을 연신 뱉었습니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꿈틀꿈틀 솟아올랐습니다.

김 검사님이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칼을 휘둘러댈 때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은 어두운 거리와 차디찬 감옥, 그리고 의문의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그 많은 부모님들은 피눈물을 쏟았습니다. 김 검사님은 정녕 민주주의를 위하여 군사독재권력에 저항하여 젊음과 생명을 빼앗기고 피울음을 토해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더럽히고 짓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정녕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짓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제가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거의 마칠 무렵 차장검사인 김 검사님을 만났던 때가 떠오릅니다. 김 검사님은 저에게 "그 때 너를 기소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그랬다면 검사님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대충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임용이 거부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여서 의례적으로 저를 위로하기 위하여 한 말씀인 줄은 알았지만 서로 화해의 대화를 나눈 것 같아 제 속으로는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환경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될 것 같은데 내가 환경문제 전문 변호사로 일하면 어떻겠냐?"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생각을 했습니까." 저는 김 검사님이 이런 이야기까지 했을 때 '아, 이제 당신도 옷 벗을 생각을 하는 구나. 시간이 흐르면 옛 것은 가고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구나'하고 가슴 한켠이 뭉클했습니다.

제가 떳떳하지 못하게 사적인 이야기를 이처럼 늘어놓는 것은 그 때 제가 받았던 '감동'이 지금까지 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고 소중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그 '감동'을 저의 가슴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야할 것 같습니다.

김 검사님은 마음속으로 사표를 쓴지 오래 됐다고 했지만, 나는 김 검사님이 이미 오래 전에 우러나는 부끄러움으로 사표를 써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검사님이 말하는 '저항'과 '치욕'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온 저희 세대들에게는 참으로 비겁한 언어의 유희처럼 느껴집니다. 구차하게 자신을 순교자연(然) 치장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 뿐입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계란으로 바위를 쳤다면, 이제 김 검사님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동키호테의 어리석은 용기와 '위용'이라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김 검사님 말대로 직위란 '눈위의 기러기 발자국'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김 검사님 말대로 "있어야 할 사람은 남아 있고 떠나야할 사람은 떠나는 것"이 흉한 뒷모습을 지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 검사님은 개혁의 주체인 장관과 개혁의 대상이 된 김 검사님이 먼 훗날 자연인으로 돌아가 서로 다정하게 손잡고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웃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원치 검사님!!! 당신이 손잡고 과거를 이야기해야 할 사람은 장관이 아니라 바로 김 검사님이 휘두른 칼에 젊음과 생명과 피눈물을 바쳐야 했던, 우리 시대의 아픈 과거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글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김 검사님과 처음 대면하던 날과 교도소를 나서던 날을 떠 올려 봅니다.

음침하고 지옥 같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나와 검찰청을 향하면서 자동차 소리와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제 살았구나'하는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김 검사님은 검사실에서 어머니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따끈한 설렁탕도 배달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쏟아지는 설렁탕을 뻘게지는 눈물로 퍼먹었습니다. 꿋꿋해 보이려고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로 범벅이 된 설렁탕을 꾸역꾸역 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마련해준 김 검사님의 호의를 고맙게 간직했습니다. 두꺼운 수사기록을 꾸밀 때도 '이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노라'는 우리의 외침이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아무런 후회가 남지 않았습니다.

3여년의 형기를 마치고 교도소문을 나설 때, 보고 싶었던 지인들을 빼 놓고는 김 검사님을 참 만나고 싶었습니다. 6월 시민항쟁을 지켜본 당신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고, 검사실에서 면회를 시켜준 당신의 호의에 감사를 드리고도 싶었습니다.

저는 어수룩하게도 마음이 여린 편입니다. 김 검사님이 베풀어준 작은 호의에도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대공분실'과 '국립호텔 투숙' 경험을 가진 많은 다른 동료들도 같은 체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저 때문에 고통을 당한 주변 사람들, 그리고 저 때문에 '죽음'과 '희생'을 당한 후배들을 생각하며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으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김 검사님도 '검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한 고통과 희생에 대하여 미안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란스러운 수사와 추한 뒷모습 대신에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의 커다란 흐름에 새로운 마음으로 동참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는 작은 호의에 감동하듯이 '진지한 화해'에 대하여도 깊이 감동할 것입니다. 그래서 김 검사님 말대로 자연인으로 만나 서로 상대방이 되어 함께 나누었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며 작은 술잔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 저는 김 검사님이 과거를 이야기하며 참회와 사과의 악수를 청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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