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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씨.
김순옥 씨. ⓒ 강성관
"사회가 안아주고 보호해야 할 아이들은 여러 부류가 있다. 하지만 저 스스로는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은 특수아동으로 분류하고 싶다. 더 큰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 김씨는 작년 6월부터 소위 '학대아동'들을 위한 집을 마련해 살림을 꾸려오고 있다.

김씨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종교에 심취"하면서다. 이전에 김씨는 "개인적으로 충격과 아픔을 간직하면서 혼란의 시절이었다"는 80년대를 살았다. 80년 직장 생활을 했던 김씨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을 겪었다.

당시 김씨는 "지오쎄 언니들과 전남도청에서 부상자들의 치료 등 관리하는 일을 했"고 "5·18을 겪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지만 김씨에게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 '비상구'가 되어 준 것이 종교였고, 한편으로 인생의 목표를 찾아가는 좋은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종교의 교리를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해왔다. 결국 나의 최종적 삶의 모습을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자신의 고민을 90년부터 살레시오수도회가 운영해 오고 있는 '나눔의 집'에서 풀어냈다. 김씨는 92년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34살이 되던 94년부터 광주대학교에서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을 하게된다.

"보육시설과 한센병 환자 시설 등에서 활동하면서, 50년과 60년대에는 고아원이 시급한 시설이었지만 80년대 중반에는 이 아이들의 의식주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심리적·정서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

"부모들과의 관계개선이 중요"

김씨는 '탈시설화'를 모색했고 "몇몇 신부들과 가정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부모들에게 학대받으며 살았던 아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마음의 상처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는 곧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인 '보육시설'과는 다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씨는 비로써 2002년 6월 2일 한 아이와 함께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 그런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 이후 광주아동학대예방센터를 통해 3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찾아, 가족이 다섯으로 늘었다.

김씨는 이곳을 "무슨 '집'이라기보다는 그냥 '보금자리'라고 이름 붙였다"고 귀뜸했다. 평소의 생각해 왔던, '시설'이라는 공간이 갖는 한계를 염두해 두지 않고 일반적인 가족의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그런 '집'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어서 '보금자리'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아이들이 간직한 마음의 상처는 완쾌되지 못하고 있어 못내 아쉽다. 이곳에서 함께 지내는 아이들은 그 만큼 끔찍한 경험을 했기 때문 일게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모두 이혼를 했고 아이들을 학대했다. 어떤 아이는 부모가 이혼을 하고 친부모가 입양을 보내면서 사망신고를 해버린 경우도 있다. 아직까지 김씨는 이 아이에게 호적을 내밀 수가 없다.

이 아이는 입양을 한 후 하우스 농사를 짖는 양부모 밑에서 잦은 구타를 당하면서 가출을 자주하게 됐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출을 하면 수녀원으로 찾아와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이 아이는 가출한 지 몇 주가 되어서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가출은 유일한 자기방어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도화지에 자화상을 그리는데 자신을 밧줄로 꽁꽁 묶여있는 사람으로 그렸다.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고 했다. 수녀님들과 상의해서 '우리가 맡겠다'고 부모님들에게 동의를 얻어서 함께 살게 됐다."

이렇게 첫 아이와 한 식구를 이뤘다. 이후 '보금자리'로 찾아든 아이들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한 아이는 아버지의 구타로 팔이 부러지고 전치4주 진단을 받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쇠파이프로 손가락을 맞아 뼈가 으스러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씨가 아이들을 돌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은 일상처럼 챙겨야 하는 일 중에 하나다.

"아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나무로 남고 싶다"

5명의 식구들이 기거하고 있는 '보금자리'
5명의 식구들이 기거하고 있는 '보금자리' ⓒ 강성관
"아이들이 아직 부모와 집에 대해서 커다란 두려움이 있다. 집에 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바람이어야 하는데 가장 큰 벌을 '집에 가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아이들 마음이 풀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부모들과의 관계가 개선돼서 부모들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바란다." 그래서 김씨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아이들과 부모들의 관계 개선이다.

이렇게 아직까지는 집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아이들을 볼 때가 가장 기쁜 것이 김씨의 마음이다.

"언제나 젊은 엄마 역할을 하고 싶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쉽지만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여름 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그런 나무로 남고" 싶은 김씨.

그래도 당장 걱정은 살림을 꾸려 갈 호주머니가 걱정이다. 지금 집은, 주위의 도움으로 '공'으로 살고 있지만 4월이면 세를 얻어 광주로 이사를 나가야 한다. 다행히 1년 밖에는 안되지만 지난해 9월부터 광주아동학대예방센터를 통해 지원을 받아 괜찮지만 올 8월이 지나면 걱정이다. 김씨는 광주에서는 부업을 할 생각이다. "나무로 남고 싶은" 욕심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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