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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거리에서 만난 아이
바그다드 거리에서 만난 아이 ⓒ 성혜란
암만 시내를 한 시간도 채 벗어나지 않아서 감쪽같이 눈이 사라졌다. 세 대의 차로 나누어 타고 국경으로 달리는 한국 반전 평화팀(이하 평화팀)은 깜깜한 창 밖을 바라보며 드디어 바그다드로 가는 길에 올랐음을 실감했다.

흔들리는 차에, 몸을 떨리게 하는 추위에 시달리며 평화팀은 국경에 도착했다. 요르단 국왕의 사진이 거대한 후세인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이라크 국경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짐을 검사 받고, 카메라와 캠코더의 일련 번호를 알려주는 등 이라크로 들어가는 마지막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늘 함께 하게 될 낯선 동행인들을 만났다. 여행 가이드와 관광청 직원 두 명. 이들과 함께 다시 새벽길을 달려 바그다드로 향했다.

적막한 국경지대를 차들만 쌩쌩 달린다. 차 안의 사람들은 하나 둘 잠에 빠져들었다. 주위는 온통 시커멓고,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들 뿐이었다.

눈을 떴다. 밤새 사람들을 괴롭혔던 추위는 이미 사라졌고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새하얀 요르단 건물과는 다른 황토색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반전 평화팀의 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바그다드였다.

2003년 2월 28일 - 바그다드, 폭풍전야

바그다드의 거리, 골목에는 아이들이 많다. 구두통을 메고 가는 아이, 골목 어귀에서 구슬 치기를 하는 아이, 공터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걸어 가는 아이. 요르단과는 달리, 어디를 가나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얼굴에 버짐이 피고, 손과 발이 새까만 이 아이들은 이방인들을 낯설어 하지 않는다. 평화팀이 건넨 'NO WAR' 배지를 가슴에 달고 신나서 동생이나 친구를 또 데려 온다. 그 아이들의 웃음에서 전쟁의 위협을 보기란 너무나 어렵다.

평화팀이 눈으로 본 바그다드의 분위기는 이 아이들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상점에서 만난 사람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일상'을 보내고 있다.

관광 비자로 들어 온 이상 최소한의 관광 일정을 지켜야 했던 평화팀은, 바그다드에서의 첫날 이런 느낌을 나눌 수 있었다. '전쟁의 위협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첫날 일정을 마치고 가진 회의에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언급한 한 마디다.

새롭게 건물이 올라가고, 신부와 신랑이 환하게 웃으며 결혼식을 치른다. 평화팀이 겉에서 본 바그다드는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계속 건물을 짓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추측에 평화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근래 부쩍 결혼식이 많아졌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실상 '전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개전 시기까지 여유가 있으면 절대 나가는 일이 없다는 기자들까지 바그다드를 빠져나가고 있고, 일본 대사관 측에서는 자국민들을 찾아 출국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라크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말또한 전해졌다. 거리에서는 무장한 군인들과 경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평화팀이 '평범한 일상'으로 보았던 바그다드는 조심스레 전쟁을 인식하고 있었다.

2003년 3월 1일 - 우리는 평화팀이다

휴먼 쉴드 집회에 참가한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
휴먼 쉴드 집회에 참가한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 ⓒ 성혜란
도착한 다음 날인 3월 1일, HUMAN SHIELDS가 주최한 집회에 참여했다. 당일 아침에 급하게 준비한 피켓을 들고, 모두들 목청을 높이며 해방 광장이라고 불리는 타리르 광장으로 향했다. 대열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각국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누군가가 크게 선창을 하면 국적을 불문하고 한 목소리를 냈다. "NO WAR!" "YES PEACE"가 거리를 메웠다. 구경 나온 시민들 속에서 아이들이 대열을 따라 달리기도 했다. 대열에서 다시 외쳤다. "이라크의 아이들을 죽이지 말라!"

모든 집회 참여자가 인간띠를 형성한 타리르 광장에서 만난 제니 노튼(미국, HUMAN SHIELDS)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른다. 전쟁이 아직 안 났기 때문에, 결국 막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남아 있다. 미국 시민들도 이라크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2003년 3월 2일 - "부시, 당신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쉽던가요?"

관광을 하며 훑어 본 바그다드를 전체로 규정할 수는 없다. 구걸하는 아이를 촬영하는 것을 막지 않을 정도로, 더 이상 '가난'은 바그다드의 치부가 아니다. 1991년 걸프 전 이후 가해진 경제 제재로, 이라크는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경제난을 겪고 있다. 돈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한다는 사람, 망가진 채 방치된 건물, 검은 차도르를 쓴 채 아이를 한 손에 잡고 구걸하는 여자들, 구두닦이를 하는 소년들까지 바그다드 전반에는 경제 제재의 처참함이 깔려 있다.

십 년이 넘게 지속되어 온 경제 제재는 걸프 전 이후의 이라크를 원상복구 시키지 못했다. 평화팀이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비극을 3월 2일 숙소로 직접 방문한 캐시 켈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IPT 총책임자 캐쉬 캘리
IPT 총책임자 캐쉬 캘리 ⓒ 성혜란
미국 '광야의 소리' 대표이면서 IPT의 총책임자인 캐시 켈리는 걸프 전 당시 이라크에 있었다. 걸프 전 이후 미국으로 돌아갔고 이후 이라크에 대해서 잊었던 그녀는 미국의 경제 제재가 어떻게 이라크를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지 알고 괴로웠다.

이라크의 한 병원에서 그녀는 죽어 가는 많은 아이들을 보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질병 이외에도 치료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 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맞는 산소 주입 호스가 없어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아이들, 오히려 병원에서 병균에 감염되는 아이들. 그녀가 병원을 방문한 어느 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한 아이가 죽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울고, 주위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간호하던 어머니가 울었다. 자신의 아이가 곧 그렇게 죽어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시 켈리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전쟁의 처참함이 전쟁만으로 끝나지 않음을, 이라크에 다시 돌아 온 전쟁의 위기는 그러한 비극을 또 한 번 반복할 것임을 설명했다.

걸프전 당시 파괴된 알 아마리아 방공호
걸프전 당시 파괴된 알 아마리아 방공호 ⓒ 성혜란
알 아마리아 방공호는 걸프 전 당시 420여명의 목숨을 묻은 곳이다. 그곳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단 열 두 명. 두 번의 폭탄 투척으로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이는 58명의 어린이와 200여명의 여자, 나머지는 노인이나 싸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켈리는 분노했다.
남자들은 이미 전쟁터로 나가고, 전기와 수도가 끊긴 상태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남아 있는 가족들이 알 아마리아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알 아마리아 방공호 공격은 치밀했다. 5톤이 넘는 방공호 문을 부수어 출구를 막아 놓았다. 철근으로 강하게 지은 방공호에 한 번의 폭탄 투척으로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멍 속으로 두 번 째 폭탄을 떨어뜨렸다.

평화팀은 직접 알 아마리아 방공호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검게 그을린 내부, 폭탄 투척으로 새파란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큰 구멍, 그곳에서 죽어간 아이들과 여자들의 사진. 마침 방공호에서는 당시 상황을 연극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얼굴에 화상 분장을 한 배우의 절규와 그 연극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물과 흐느낌은 다시금 지금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부시나 클린턴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그들에게는 전쟁이라는 것이 쉬워진 문제인지." 캐시 켈리에게 모든 전쟁은 이런 상황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그녀는 다시 이라크로 돌아 왔다.

2003년 3월 4일 - 타흐리르 광장, 이 거리를 지키고 싶다

평화팀과 바그다드의 시민들이 함께 만든 플래카드
평화팀과 바그다드의 시민들이 함께 만든 플래카드 ⓒ 성혜란
3월 1일 집회로 기억되는 타흐리르 광장을 다시 찾아가 평화팀만의 행사를 벌였다. PEACE라는 글자가 한 가운데 자리잡고, 양 옆으로 아이들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있는 플래카드를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이라크인들과 함께 만들었다. 플래카드에 색칠을 하는 손은 아이들, 군인, 우리와 늘 동행하는 여행 가이드, 비밀경찰들까지 다양했다. 플래카드를 제작하는 한 편에서는 평화팀이 아이들에게 페이스 페인팅을 해 주고 있었다. 조그맣고 때 절은 얼굴에 색색으로 'PEACE'와 'NO WAR'를 정성스럽게 그리는 평화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얼굴을 내민 아이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라크 어린이의 얼굴에 'PEACE'를 새겨 넣고 있는 평화팀 박기범 씨
이라크 어린이의 얼굴에 'PEACE'를 새겨 넣고 있는 평화팀 박기범 씨 ⓒ 성혜란
준비해간 모든 것을 다 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타흐리르 광장의 3월 4일 한낮은, 평화팀 모두에게 전쟁으로부터 바그다드를 지켜내야 하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2003년 3월 5일 - 익명의 인간방패들

3월 5일, 바그다드를 떠나는 차에 올랐다. 암만으로 가기 전 잠시, 타이지 식량 저장 창고에 들렀다. 그곳에는 HUMAN SHIELDS인 한 한국인 청년(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함)이 머물러 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이제는 오히려 담담하다는 그는 한 동안 식량 저장 창고에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된다.

그처럼 이라크에 남아 있겠다고 결심한 HUMAN SHIELDS는 대략 1백15명 정도. 이라크 당국과의 마찰 때문에, 한꺼번에 60여명이 빠져나가는 등 HUMAN SHIELDS 또한 그 수가 많이 줄었다. 이라크 당국은 HUMAN SHIELDS의 숙식을 돕고, 집회를 열 수 있도록 많은 혜택을 주는 듯 하지만 급박한 시기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도는 상태이다.

3월 2일 회의 이후 HUMAN SHIELDS는 지정된 사이트, 폭격예상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에 그들이 전쟁시기에도 머무르길 원했던 병원, 학교, 고아원 등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이라크 정부가 지정한 발전소 두 곳, 정수시설, 석유 정제소, 식량저장창고, 5개 사이트로 이동해야 했다.

2003년 3월 6일 - 다시, 암만으로

평화와 미소
평화와 미소 ⓒ 성혜란
암만에서, 얼마 전 보았던 폭설의 흔적은 별로 찾아 볼 수가 없다. 며칠 전과 너무도 다른 풍경에 평화팀은 낯설어하면서도 다시 암만에서의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암만에 도착한 3월 6일, HUMAN SHIELDS 암만 사무국을 찾아갔다. HUMAN SHIELDS 비자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간 평화팀에게 들려 온 소식은 뜻밖의 것이었다. 더 이상 HUMAN SHIELDS 비자는 발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HUMAN SHIELDS 사무국 또한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으며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HUMAN SHIELDS를 가장한 스파이를 이라크 당국이 경계한다는 것 정도로 예측할 뿐이다.

HUMAN SHIELDS 암만 사무국에는 비자를 기다리는 사람들, 바그다드를 떠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타리르 광장에서 만났던 제니 노튼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전쟁시 폭격에는 견뎌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폭동은 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폭동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HUMAN SHIELDS 사무국과 함께 일할 것이다."
제니 노튼은 바그다드를 떠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반전 평화팀의 구성원 또한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HUMAN SHIELDS 비자가 불가능해진 지금 다른 길을 찾고 있다. 요르단에 머무르는 사람은 난민지원활동을 계획하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곳에서의 활동을 고민 중이다.

3월 7일 새벽 한 시경. 여섯 명의 한국 반전 평화팀이 암만 공항에 도착했다. 새로운 각오로 또 다른 시작이 준비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대학생신문 18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www.e-unipress.com
성혜란 기자는 대학생신문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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