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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랬을까? 커서 아빠하고 결혼한다고. 그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고, 친정 어머니도 별 말씀 없으신 걸 보면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둘째 아이는 '이 다음에 아빠랑 결혼할거야' 정도가 아니라 이미 여섯 살 때 아빠와 결혼해서 인형 아기까지 낳은 사이이다.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말이다. 아기의 이름은 또롱이. 일으켜 세우면 눈을 반짝 뜨고, 눕히면 눈을 스르르 감는 예쁜 아기였다.

"엄마도 아빠랑 결혼하고, 너도 아빠랑 결혼하고, 이제 우리 서로 뭐라고 부르지?" 했더니,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는 헌색시, 나는 새색시라고 부르면 되지, 뭐." 한다. 제 언니와 나는 서로 눈을 맞추며 터져나오는 웃음을 깨물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아빠에게 또롱이 엄마가 무어라 보고했는지, 또 또롱이 아빠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몇 년이 흘러 그 인형 또롱이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보이지 않고, 헌색시와 새색시 이름도 부를 일이 없어졌지만 아이와 아빠 두 사람의 유별나고 아기자기한 재미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가끔 쓸쓸한 아버지께〉를 읽다가 중간 쯤 넘겼을 때 그만 푹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의 결혼 이야기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스물 한 살 여성의 글이었는데, 우리 둘째 딸도 스무 살이 넘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럴까…인형 아기 또롱이까지 낳았던 일을 기억할까…. 기분좋은 웃음 꼬리가 제법 길게 이어졌다.

〈가끔 쓸쓸한 아버지께〉는 〈참 다사로운 어머니께〉(책 속의 노년 52 참고)와 짝을 이루는 책으로, 일본 마루오카 마을이 주최한 '일본에서 가장 짧은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대회 수상작을 모아 놓은 것이다.

"아버지는 커다란 삼나무같아. 꼭대기에 올라가 저 멀리 보고 싶어." 여덟 살 짜리의 편지에서부터 "아버지, 내 방에 마음대로 들어오지 마. 내 방에는 아무 것도 없어."하는 열 일곱 아들의 편지, "여자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세상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쉰 아홉 살 딸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글은 스물다섯 글자에서 서른다섯 글자 사이로 지나칠 정도로 짧지만 오히려 짧아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짐작하고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편지 내용 중 전쟁과 얽힌 이야기들은 일본 사람들, 특히 전쟁의 당사자라 일컬어지는 노년 세대와 그 자녀 세대에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 그림자로 남아있는지 보여준다. "전쟁에 나갔던 아버지께, 아버지도 사람을 죽였어? 그 옛날, 아무 것도 모르고 철없는 질문해서 미안해요." "암갈색 군복 차림의 사진, 힘드셨지요? 다시 태어나신 곳은 평화로운 세상이겠지요? 아버지." 딸들은 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은 아버지들을 향해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아버지, 자신의 곁을 떠나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던 외로움과 슬픔, 아버지가 떠나고나서야 비로소 행복해진 가족들의 이야기는 이 편지에 이르러 가슴 저 밑바닥을 쿵하며 내려앉게 만든다. "왜 그다지도 나를 때렸을까. 자식을 낳고 보니 더더욱 알 수 없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식들이 자신과는 말도 안섞으려 하는 나이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알게 되고, 쌀쌀하게 끊어버린 전화 한 통까지도 마음에 남아 후회하게 되는 걸 보면, 자식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어린 아이인지도 모르겠다. 구부정한 어깨, 휘어버린 등과 허리, 이제 직장에서는 퇴직하고, 늙어 병든 아버지. 남은 것은 연민과 안타까움뿐이지만 병석에 누워서도 그저 오래 살아주시기만을 비는 마음이 편지에는 그대로 살아있다.

짧은 글 속에 담긴 아버지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아버지를 읽고, 아이들에게 오래도록 남게 될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도 책에 실린 글들을 흉내내 나도 아버지께 한 번 써본다. "아버지, 정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아버지의 자녀 세대가 꾸려가는 세상도 한 번 믿어주세요."

〈참 다사로운 어머니께〉〈가끔 쓸쓸한 아버지께〉 두 권을 나란히 놓고 보니 어머니 앞의 '다사로운'과 아버지 앞의 '쓸쓸한'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아버지의 삶은 이렇게 다사로움보다는 쓸쓸함 쪽에 기울어있다. 그것도 가끔이 아니라 자주.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아버지들의 삶에서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무엇인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얇은 책 한 권에서 배운다.

(가끔 쓸쓸한 아버지께 / 마루오카 마을 엮음, 노미영 옮김 / 마고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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