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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진씨
윤상진씨 ⓒ 오마이뉴스 이승욱
"저의 사례가 단순한 해프닝이나 한 개인의 일로 치부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가 없도록, 은행과 경찰이 고집하는 '관행'을 고치기 위한 사회적인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했던 대학생 윤상진(27. 경북대 96학번)씨는 얼마 전 겪었던 뜻밖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씨는 지난해 11월 26일 대구 경북대학교 경상대학 건물에서 피해자 김아무개씨의 지갑을 훔치고 현금카드를 이용해 학내 학사민원실에 설치된 대구은행 CD기(현금인출기)를 이용, 370만원을 인출했다는 혐의로 경찰로부터 절도 용의자로 '수배'를 받았다.

당시 피해자로부터 사건을 접수한 대구 북부경찰서는 대구은행에서 제출한 절도범의 현금인출 시각(오후 1시 12분 35초), CC-TV에 찍힌 윤씨의 사진을 바탕으로 수배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 단대 건물 게시판과 도서관 등 학내 곳곳에 50여장의 수배전단을 부착했다.

이때까지 윤씨는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수배'를 받았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학교를 떠나 있던 윤씨는 급기야 자신의 여자친구가 전해준 '수배' 소식에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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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수배생활(?)...공포와 수치스런 기억들

윤 씨의 CC-TV 촬영사진과 함께 작성된 수배전단지가 지난 12월 초부터 경북대 곳곳에 붙여졌다.
윤 씨의 CC-TV 촬영사진과 함께 작성된 수배전단지가 지난 12월 초부터 경북대 곳곳에 붙여졌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윤씨는 지난해 12월 23일 처음으로 자신의 수배전단이 교내 곳곳과 인근 파출소 등에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때부터 윤씨의 '수배생활'(?)이 시작됐다. 당시의 아찔했던 순간을 윤씨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었다.

"그 때는 정말 정상적인 사람도 이렇게 죽겠구나. 자살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원래 쾌활한 성격이었던 저도 그 상황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는 게 불가능했어요."

윤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나는 정말 아닌데, 내가 한 게 아닌데…. 이렇게 경찰에 끌려가면 내가 했다고 자백하지 않을까. 수배전단이 사방에 붙어 있는 걸 보면 '내가 혹시 정신이상이 생겨 실제로 범행을 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윤씨는 학교 밖으로 나가면 경찰에 잡혀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학교 안을 전전했다. 간혹 늦은 밤에 집을 찾긴 했지만 윤씨는 심장병 수술로 치료중인 아버지와 노모에게 차마 이 사실을 말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홀로 삭혀야 했던 윤씨의 고통은 컸다.

당시 윤씨를 바라보는 시선도 따가웠다. 학교 안에서 만나는 선·후배와 동기들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간혹 수배전단을 본 사람들이 '수배자 지나간다', '도망가기 전에 고발해서 포상금 타자' '그거 정말 너 맞느냐'는 등 이런저런 말을 수군됐죠. 농담으로 무심코 던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당하는 사람의 모멸감은 말할 수 없었어요."

결국 윤씨는 지난 1월 6일, 용기를 내 문제의 대구은행 안전관리팀을 찾았다. 이 때 윤씨는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 사건 당일 자신이 CD기를 이용하고 챙겨뒀던 명세표에 나온 시각(12시 59분 58초)의 CC-TV 화면을 확인한 결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찍혀 있었던 것.

윤씨는 CD기의 시각과 CC-TV 화면에 찍힌 시각이 13분 정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윤씨는 "범인이 인출했다는 시각보다 13분 뒤의 화면을 보면 진범을 확인할 수 있지 않겠냐"며 안전관리팀 관계자에게 화면을 보여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했다. 당시 이 관계자는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기계를 속일 수 없다"며, "화면을 더 확인하려면 경찰과 협의해야 한다"고 거부했고, 더 이상의 확인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결국 윤씨는 피해자를 어렵사리 만나 '자신이 범인이 아니다'고 애써 설득시키고 난 후에야 은행을 다시 찾았다. 이 때도 공개를 꺼리던 은행측은 피해자와 윤씨의 강력한 요구한 끝에, CD기 주변을 서성이고 여러 차례 불법인출을 했던 같은 학교 학생인 진범 손모(28)씨을 CC-TV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은 지난 1월 28일 손씨를 우여곡절 끝에 검거했다.

CC-TV 시각 달라 기기오류 확인...진범은 다른 시간대에

ⓒ 오마이뉴스 이승욱
윤씨는 애초 대구은행에서 불법인출 신고를 받고 기기 오류에 대해 신경을 썼더라면, 자신이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윤씨는 "은행측이 좀더 신경을 써서 불법인출이 있던 전후 시간대의 CC-TV화면을 검토해 봤더라면 기기 오류도 알 수 있었고, 8차례나 주위를 서성이며 370만원을 인출했던 진범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은행측은 세심한 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기본적인 확인절차도 거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씨는 은행 뿐만 아니라 수사를 맡고 수배 전단까지 뿌린 경찰에 대해서도 항의했다. 처음 은행을 찾았던 다음날 윤씨는 관할 북부경찰서의 담당형사인 김아무개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윤씨는 "그 형사에게 '직접 경찰서에 가서 만나겠다'고 말했으나, '바쁘다'고 대답했고, 약속을 잡고 찾았던 날도 김 형사는 약속도 잊은 채 그를 맞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CC-TV의 시간 오류나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아 지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어요. 이 때 수사의지만 좀더 가졌더라도 저도 혐의를 빨리 벗고, 진범도 더 일찍 찾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요."

그 후 윤씨는 은행에서 확인했던 진범의 사진을 직접 들고 다시 경찰서를 찾았다. 그제야 경찰은 "잘못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경찰 측 관계자들은 "은행측에서 CC-TV 화면을 제출하면 관행으로 전단을 만들어 부착하게 돼 있다"며 발뺌하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또 경찰측에 사과문을 내고 공식 사과하라는 윤씨의 요구에 대해 "정정 수배전단을 내겠다"면서 "정정 수배전단에 '사과한다'는 문구를 넣는 것조차도 북부경찰서 이름으로 나가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라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경찰, "관행이다" 발뺌...피해자 인권은 '나 몰라라'

정정 수배전단이 나간 이후 진범은 잡혔지만 윤씨에 대한 공식 사과문을 게재하는 등 윤 씨의 명예회복을 위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 담당형사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윤씨의 연락도 회피하기 급급했다고 한다.

참다못한 윤 씨가 최근 감사원과 청와대, 언론사 등에 자신의 사연을 소개하고 팔을 걷고 나서자, 북부경찰서는 정보과 형사 등을 보내 요구를 들어주겠다며 '때늦은' 응답을 해 올 뿐이었다.

일련의 사태를 겪은 윤씨는 해당 경찰 관계자들의 '인권지수'에 대해 개탄했다. "경찰이 엉터리 수사를 한 것도 참을 수 없지만, 인권을 침해당한 시민의 요구에 화답조차 않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경찰이 시민의 인권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윤씨는 현재 법적 소송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관행'을 내세우는 경찰 등 관계기관의 태도가 억울한 제2의 희생자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예 공문화된 판례를 만들어야겠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한편, 대구은행 안전관리팀 강두호 차장은 25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CC-TV의 시간이 기계상의 오류 등으로 잘못 기록돼 결과적으로 윤 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경찰이 불법인출 시 촬영한 장면을 공개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협조차원에서 제출한 것이지 수사는 경찰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수배전단지를 제작한 북부경찰서 한 관계자도 "피해자와 은행측의 판독을 마쳤다는 것만 믿고 확인작업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등 수사 처리가 잘못됐던 점은 인정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평소에는 CC-TV를 확인작업을 거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대학 안에서 벌어졌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하고 "정정 수배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면서 윤 씨가 '은행과 경찰의 잘못으로 무고하게 수배됐다'는 부분을 넣어 배포한 만큼 별도의 사과문을 게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대구은행과 경찰측은 윤 씨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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