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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앞에서 까오씨
공장 앞에서 까오씨
외국인 근로자들이 산업연수생으로 생산현장에서 기술을 습득하며 국내 노동 시장의 일익을 담당해 온 지도 오래다. 안양시에도 34개 업체에 86명의 연수생들이 일하고 있다. 조국을 떠나 머나 먼 한국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들 중에 '억척'으로 소문난 '까오 위 빠오'(38세 중국 산동성)씨를 만나 보았다.

보통 근로자 두 몫을 거뜬히 해 치운다는 그가 일하는 곳은 관양2동에서 화장품 용기를 제조하는 (주)천경이다. 천경의 권혁탁 사장은 지난해 봄, 비행기표를 마련해 주며 일주일 간 고향에 다녀오도록 특별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성실성을 인정받은 '까오 위 빠오'씨는 천경이 곧 중국 현지에 투자, 설립할 공장의 공장장 후보 '0순위'에 올라 있기도 하다.

취재팀이 안내된 쇼룸에는 천경에서 생산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화장품 용기들이 오밀조밀하게 전시되어 있다.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용기는 세계적 특허까지 받은 플라스틱 케이스라고 한다. 갖가지 모양의 용기들을 감탄하며 살펴보고 있을 때 작고 왜소한 체격의 '까오'씨가 들어왔다. 지난밤 24시간 종일 근무로 눈이 다소 충혈된 그는 취재팀을 향해 순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까오는 어떠한 일을 맡겨도 요령을 피우지 않고, 매사에 내일처럼 애사심이 강해 우리나라 근로자들과도 잘 적응하고 있어요. 기술을 배우는데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안내하던 우성길 관리과장은 흡족한 미소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곳에서는 내국인과 외국인에 대해 차등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연수생들은 기숙사에서 거주하는데, 회사의 대우가 좋아 일단 정착하면 나가려고 하질 않는다고.

(주)천경에는 현재 9명의 외국인 연수생들이 근무하고 있다. 연변 등의 조선족 동포는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만, '까오'씨처럼 한족은 대개 행동으로 의사소통을 대신해 언어적응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취재를 위해 통역봉사를 기꺼이 자원한 오현자(26세 중국동포)씨의 도움으로 '까오'씨와 일문일답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까오씨는 중국 산동성 출신으로 고향에 부모님이 계시고, 5남매 중 장남으로 농사일을 하는 부인과 사이에 남매(15세. 13세)를 두고 있다. 한국에 오게 된 동기를 물었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한국의 앞선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아울러 선진 기술을 습득해 중국으로 돌아가서 성공하고 싶은 포부도 내비쳤다.

안양에 오기 전엔 오산에서 일했는데 보수와 기술 습득이 여의치 않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 웨팡시 공무원인 동생의 소개로 지금의 회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동생은 교환 공무원으로 안양시에서 6개월쯤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했다.

"처음 안양에 왔을 때는 참 깨끗하고 세련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사람들도 정말 친절했고요. 천경에 온지 2년 6개월이 넘었는데 다른 곳보다 인격적인 대우와 기술습득의 기회가 많아 아주 흡족합니다. 특근이 많아 다소 힘은 들지만 그만큼 우리 회사가 번창한다고 생각하니 보람을 느낍니다."

생산현장에서 작업중인 '까오 위 빠오'씨의 모습과
생산현장에서 작업중인 '까오 위 빠오'씨의 모습과
까오씨가 공장 일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의사소통이다. 농담 한마디를 건네고 싶어도 말이 안 통해 답답하고 매사에 긴장을 하게 된다고 한다. 한번은 고참 직원이 '뺀찌'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나무토막을 들고 가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판이 되었던 일도 있다.

또 그를 당황케 했던 일은 한국식 인사다. 중국에서라면 출근 때 '왔는가' 하면 끝날 얘긴데 여기서는 으레 '밥 먹었냐'고 묻는데 처음에는 '한번 싸워보자'는 얘기로 들려 곤욕스러웠다고 한다.

어려운 한국말 때문에 빚어진 가장 큰 실수는 원료를 잘못 배합한 일이다. 비싼 재료를 몽땅 못 쓰게 해 잔뜩 겁을 먹었는데, 사장님과 직원들이 어이없어 하면서도 웃음으로 넘겨주어 너무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다른 회사 같으면 난리가 났을 일이죠. 그때 회사가 보여준 그 관용은 백 마디의 폭언보다도 잘못을 더 뼈저리게 느끼게 하더라구요. 그 일로 인해 깊이 반성하며 더욱 잘해야 되겠다고 내심 각오도 했지만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있나요?
"고향 산동성에서는 면 종류나 밀가루 음식이 주식이라 한국 음식에 적응이 어려웠어요. 특히 처음 접한 김치 냄새가 어찌나 역하던지. 내색할 수도 없고... 하지만 이젠 김치가 없으면 허전해요. 중국으로 돌아가서 김치를 못 먹으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될 정도지요. 특히 회식하며 먹어본 불고기의 감칠맛은 잊을 수 없어요. 종종 교포끼리 돈을 모아 회식을 할 정도로 좋아하지요."

'까오'씨는 현재 비슷한 처지의 연수생 중에서 최고 대우인 월 110만원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 100만원은 아내에게 송금하고 10만원으로 생활한다. 그러자니 침식은 기숙사에서 해결하고 외출은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워낙 빠듯한 생활이다 보니 흔한 옷 한 벌 사는데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중국으로 돌아가면 안양에서 배운 기술로 꼭 성공할겁니다. 우리 중국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안양에 와서 한국 사람들의 친절과 서비스 정신을 배웠습니다. 조국에 돌아가면 한국인들의 친절을 자랑할 겁니다. 제게 길을 열어주고 꿈을 심어준 안양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안양을 무지무지 사랑합니다!"

까오씨를 만나면서 잠시 70년대 우리나라 산업역군들을 떠 올렸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싸우며 오일 달러를 벌어들인 중동의 건설 일꾼들, 밤낮없이 방직기 앞에 앉아 섬유 한국을 일군 여공들, TV 조립라인에 앉아 성실하게 전자 산업의 바탕을 닦은 여공들...

3D산업을 기피하는 오늘의 우리들은 어쩌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서 과거의 근로의욕을 되찾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또순이 이미지를 연상시킬 만큼 억척스런 까오씨와의 짧은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면서, 나 자신부터 정신무장을 가다듬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 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우리안양>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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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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