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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초등학교의 석축 아래에 인도가 갑자가 좁아진다. 이곳을 지나치기에 참 '애로사항'이 많다.
세검정초등학교의 석축 아래에 인도가 갑자가 좁아진다. 이곳을 지나치기에 참 '애로사항'이 많다. ⓒ 이순우

하루가 멀다하고 길을 닦고 넓히는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구태여 이만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알고 봤더니 이 역시 문화재의 힘이었다. 축대의 바로 위에는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5호)가 서 있었다. 세검정초등학교 교정의 모통이에 자리잡은 이 당간지주와 축대담장까지의 거리가 불과 3미터 남짓.

그러니까 이만한 거리로는 옴짝달싹 할 수 있는 공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인도를 넓히자니 당간지주가 배치되어야 할 최소한의 공간확보가 어렵고, 현 상대로 두자니 행인들의 불편은 가중되는 상황이 거듭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문화재는 제자리에서 보존해야 하는 것이 대원칙이므로 쉽사리 자리를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주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한 애물단지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세검정초등학교와 신영삼거리 일대. 축대 위의 동그라미 표시가 '장의사지 당간지주'이다. 그 밑에 한껏 좁아진 보행도로에 행인이 날렵하게 빠져나가고 있다.
세검정초등학교와 신영삼거리 일대. 축대 위의 동그라미 표시가 '장의사지 당간지주'이다. 그 밑에 한껏 좁아진 보행도로에 행인이 날렵하게 빠져나가고 있다. ⓒ 이순우
실제로 당간지주의 위치를 물러달라는 청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지 지난 1999년 7월 22일의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회의 때에는 '장의사지 당간지주 이전요청의 민원'이 검토되었으나 관련사항이 부결된 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다시 2000년 4월 20일에 개최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회의 때에는 한걸음 물러나 당간지주 쪽으로 인도폭만이라도 확장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이 역시 결과는 부결이었다.

세검정초등학교 교정의 장의사지 당간지주. 개발논리에 맞서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그 상대가 자동차가 아니라 행인이라는 것이 덜 부담스럽다.
세검정초등학교 교정의 장의사지 당간지주. 개발논리에 맞서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그 상대가 자동차가 아니라 행인이라는 것이 덜 부담스럽다. ⓒ 이순우
그러니까 앞으로도 당분간은 현재 상태에 어떠한 변경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의 기록을 뒤져봤더니 장의사지 당간지주의 이전을 결정했던 흔적이 없지는 않다.

1968년 8월 5일에 개최된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에는 "보물 제235호 장의사지 당간지주를 교사신축에 따라 15m 이전하는 안, 가결"이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따라 실제로 당간지주가 옮겨졌는지는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다. 예전의 사진자료와 대조해보건대 이 당간지주가 제자리에서 옮겨진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돌이켜 생각건대 덕수궁 대한문과 광희문과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와 보신각과 수표교와 삼전도비 등이 줄줄이 길 밖으로 밀려나거나 다른 곳으로 터를 옮겨야 했을 정도로 개발논리가 한창 판을 치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상기한다면, 이만한 몰골로나마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용하다면 용하다고 해야하는 것이 옳겠다.

간혹 서울 송파구의 석촌동 고분지역처럼 한번 큰길이 뚫렸다가 다시 지하차도가 개설되어 간신히 완전파괴를 모면한 사례도 없지는 않았지만, 한번 파괴되고 나면 다시 복구하기 어려운 것이 문화재이거늘 그러니까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불편이 따르는 법. 그것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 또한 항상 고민거리인 셈이다.

<국보도록>(1957)에 수록된 장의사지 당간지주의 모습. 여전히 그 주변이 한적하게 느껴진다.
<국보도록>(1957)에 수록된 장의사지 당간지주의 모습. 여전히 그 주변이 한적하게 느껴진다.
사실이지 문화재의 보존이 우선인지, 사람들의 편의가 우선인지를 완벽하게 가늠하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런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장의사지 당간지주'로 인해 불편을 겪는 대상이 행인들이었기에 망정이지 그것이 만약에 자동차였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자동차가 다녀야 할 길을 닦아내는 일에 '걸리적 거렸던' 문화재가 끝내 제자리를 지켜낸 경우는 거의 없지 않았던가 말이다.

가령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서라벌고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한글고비'(서울유형문화재 제27호)의 경우도 그러했다. 문화재의 보존을 단지 배부른 소리로만 치부하던 시절과는 상당한 시차가 있었음에도 이 비석 역시 1990년 이후 수년간에 걸친 거듭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끝내 1998년에 이르러 15미터나 뒤로 물러나면서 길을 비켜주었다. "영(靈)한 비라 건드리는 사람은 화를 입으리라"는 경고문이 비석에 버젓이 새겨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말이 좋아 문화재보존입네 뭐네 하였지만, 이미 비석 턱 밑까지 왕복 6차선 도로를 닦아놓아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도로구조를 만들어놓은 판국에 그러한 배부른 소리가 막무가내의 개발논리를 감당할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길이 좁아지고 그것이 고작 1.4미터 높이의 비석 하나 때문이었다면 그러한 원망을 누가 다 받아주었을 것인가 말이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왜 진작에 계획수립단계에서 문화재지역을 비껴나 도로설계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경성부사>에 수록된 장의사지 당간지주의 모습. 물론 지금과는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경성부사>에 수록된 장의사지 당간지주의 모습. 물론 지금과는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천만다행한 일이었지만 장의사지 당간지주는 아슬아슬하게도 도로계획선에서는 벗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대신에 사람들이 통행해야 할 정도의 공간은 확보해주지 못한 탓인지, 오늘날 같은 약간 별스러운 보행자 도로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만큼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불편은 가중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헤아려주는 것이 마땅하겠다. 문화재 보존과 사람의 편의라는 고민거리를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묘안은 정녕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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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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