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열 일곱 번의 자살 기도 경력을 가진 열 아홉 살 청년 해롤드. 그 숫자만으로도 눈부신 나이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는 것이 우울하고, 그다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언가를 향한 열정도 가져보지 못했다.

모드는 여든 살 할머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주변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명랑하고 유쾌한 할머니다. 마을 신부님의 자동차를 그저 빌려 타기도 하고, 동물원 우리 속의 바다표범을 데리고 나와 바다에 풀어놓아 주기도 한다. 75세는 너무 빠르고, 85세는 또 너무 많은 것 같아 80회 생일이 되는 날 스스로 세상을 떠나려고 마음 먹고 있다.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두 사람. 모드 할머니의 엉뚱한 행동에 해롤드가 어쩔 수 없이 엮여서 끌려다니게 되지만 그러면서 차츰 친구가 되어간다. 죽음을 꿈꾸는 청년과 인생의 끝자락에서 포기하지 않고 아름다운 삶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가는 할머니. '매일 매일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할머니의 권유는 우울한 청년에게 그저 이상한 주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새로운 하루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해롤드에게는 다 똑같아 보이는 꽃이 모드에게는 다 다른 얼굴로 다정하게 다가오고, 샴페인도 노래도 춤도 해롤드에게는 어색하고 이상하지만 모드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숲에 나무를 심으며 "잘 크거라, 변화하거라, 나중에 땅을 비옥하게 하거라" 말하는 모드는 참 잘 웃는다. 그 웃음은 아름다움을 보고 울 줄 아는 가슴에서 나왔기에 참으로 깨끗하고 천진난만하다.

해롤드는 모드를 향한 사랑을 통해 그동안 사로잡혀있던 죽음에서 벗어나지만, 모드는 그런 해롤드를 남겨두고 자신의 계획대로 80회 생일에 먼 길을 떠난다. 이렇게 사랑은 삶과 죽음의 자리를 바꿔놓으며 모드에게서 해롤드로 이어진다.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변화하는 것일 뿐'이라는 모드의 이야기는 책 속에 머무는 경구가 아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주위의 모든 것들과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끝까지 정성껏 살아온 80년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

나무로 만든 조각을 살펴보는 해롤드에게 '만져봐, 느껴봐, 나무가 신호를 보내도록' 하고 권하는 모드. 해롤드는 조심스럽게 나무 조각에 손을 갖다 댄다. 비록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채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삶 역시 만져보고 느껴보려 할 때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오는 것은 아닐지. 만지고 느껴보려는 마음이 없어 우리들 삶에서 우리 스스로 지금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드 할머니가 오래 전 젊었을 때 인도 여행을 했는데, 병 뚜껑에 인생에 교훈이 되는 말들을 새겨서 파는 것이 있어서 사가지고 호텔로 돌아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렇게 써있었다고 한다. "이것도 또한 사라져간다."

사라짐을 알고 받아들인 모드 할머니. 하루 하루의 일상을 새롭게 꾸려가면서,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붙들어 매지 않고 떠나야 할 때를 기억하며 사는 삶. 우리가 꿈꾸고 있는 노년의 모습이 그럴까.

그 모든 것에 앞서 할머니는 너무 귀엽다. 나는 다 안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줘야만 한다는 현자(賢者) 콤플렉스가 없는 할머니는 정말 너무 예쁘다. 이미 삶의 비밀과 사랑의 깊은 속을 알고 있기에 할머니는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그것을 해롤드에게,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지 않고 전해준다.

낮 공연이어서였을까. 유난히 여성 관객, 그것도 서너 명의 친구들이 짝을 이룬 5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 많았다. 노년의 입구 바로 앞에 서있는 그들에게 모드가 보여주는 노년기 여성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늙음과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가진 것을 모두 놓아버린 모드의 노년을 우리들 삶의 지표로 삼는다면, 글쎄 이 중년의 나이가 좀 덜 팍팍해 질지도 모르겠다.

(19 그리고 80, 원제 Harold and Maude / 콜린 히긴스 작, 장두이 연출, 출연 박정자·이종혁·권병길 등 / ∼ 3. 16 /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