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요즘 '대북송금' 문제를 놓고 당 안팎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다.

당 밖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와 교감 하에 국가의 중대사를 덮는 데 급급한다"는 비난이고 당 안에서는 "누구 때문에 대통령이 됐는데 대통령을 저렇게 밀어붙이냐"는 비난이다.

거칠게 그 비판 주체를 구분하자면 전자의 경우 야당과 보수세력의 비판이고 후자의 경우 민주당 지지세력 중 기존 동교동 구파를 비롯한 김대중 대통령 지지자의 비판이다.

'대북송금'이 "정상회담을 위한 것" 또는 "노벨상을 위한 것"이라는 비난과 마찬가지로, '대북송금'이 순수하게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시도"라는 변호 역시 상식적인 보통 국민들에게는 당파적인 선전 선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대북송금' 이후 "남북관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과는 별개로 현 김대중 대통령의 해명을 전적으로 믿는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면에서 불법성이 드러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을 '통치행위'라 이름 붙인다 해서 그러한 '불법행위'들이 사면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대북송금' 과정의 투명성이다. 국회의원들은 현재의 법 체계뿐 아니라 민족사의 중요한 과정들이 있다면 이를 철저히 심의하라고 국민이 뽑은 공복이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 드러난 바에 의하면 모든 일이 철저히 밀실에서 이루어졌다. 아무런 '원칙'이나 '정도'를 걷지 않은, 한마디로 국민을 무시한 '통치행위'였다. 대통령은 매번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고 하는데 미안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무시하고 만들어지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흔히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평면적으로 통일 독일의 예를 많이 드는데 동서독의 경우에도 중요한 사안은 국회의 동의를 거쳤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또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조기숙 교수의 글에서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예까지 들었는데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잘못을 내세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노사모'의 많은 이들이 노무현 당선자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원칙과 정도를 걸어온 대통령"을 내세운다. 이 나라 정치인들이 포기하기 쉬운 '지역감정'의 혜택을 외면했으며, '거대언론'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소신대로 '원칙과 정도'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장점이 역시 이번 사안에도 공평히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듯하다. 대통령의 고백을 이끌어내고 미흡한 사안은 반드시 밝히고 넘어가자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이는 그 동안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큰 힘이 되어온 시민운동단체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유감스럽지만 김민웅 기자의 글이 참으로 의아하다. 평소에 노무현 지지 성향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통령 당선자가 그렇게 상식적인 원칙을 지키는 일을 두고 지지가 떨어진다고 걱정하고 있다. 아래 그의 글을 보자.

관련
기사
노무현 당선자, 어디로 가시렵니까?

"이러한 이탈 내지는 내부적 반발현상은 특히 김대중 정권의 대북 송금과 관련한 노무현 당선자 자신과 노무현 진영의 자세에 대한, 실망을 넘어선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경악스러움이 한데 섞인 '메시지가 분명한 정치적 발언'입니다."

필자가 알기로 그러한 이탈은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을 향한 '용비어천가 세력' 또는 '연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이탈이다. 김민웅 기자의 글을 더 읽어보자.

"어떤 방식과 수준에서든, 지금의 시점에서 대북 송금 문제를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규명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장의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우리의 향후 외교 일체에 대응력의 약화와 신뢰성의 위기를 자초할, 외교사적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무지와 정파적 논리의 결과입니다."

"어떤 외교 일체의 대응력을 약화"시키고 "신뢰성의 위기"를 자초하며 "외교사적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무지와 정파적 논리"라 했다. 과연 그러한가? 필자는 그의 "외교사적 기본"이 참으로 의심스럽다. '밀실외교'와 '불법성'이 '신뢰성'을 갖게 한다는 그의 '무지와 정파적 논리'가 참으로 걱정이다.

사실 그의 진심은 윗 문장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퇴임하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선택을 철저하게 엄호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는 그 다음 단계에서 다른 누가 아닌 노무현 정권 자신의 방어망이 사라지게 될 것.

그러니까 김민웅 기자의 요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실을 국민 앞에 털어놓게 함으로써 노무현 당선자의 지지율도 떨어지고 자신의 방어망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을 잘못이 있건 없건 그저 철저히 계승하라?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왜 뽑았나? 김대중 대통령 연임시키지. (어떤 지지기반인지는 모르나) '지지기반'을 무척 중요시 여기는 그의 경고는 계속된다.

"이를 단지 개혁정치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환기적 진통이라고 이해하려 든다면 역사의 진정한 육성을 듣지 못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백치정권이 될 수 있습니다."
...
"심각성의 원인은 노무현 당선자 자신과 그 진영의 정치 외교적 오판에 그 뿌리가 있다는 점에서, 우려는 깊고도 깊습니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지지의 맹목성이다. 필자는 노무현 당선자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통치행위'가 항상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도 잘못을 시인했지만 노무현 당선자 역시 그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갈파하였다. "절차 민주주의"에서 "절차"를 어김은 그의 "정도"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차기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노무현 정권의 지지자를 자처하던 이들이 이에 우려를 표하고 반기를 들겠다고 나선다. 여러 가지 엄숙한 엄포 끝에 대북 외교의 투명성(한때는 김대중 대통령도 표방했던)에 대한 반대의 변이 또한 가관이다.

"우리는 이런 외세와 그를 따르는 세력의 야만적인 공세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민족 내부의 논의와 협상의 내용을 그대로 밝히고 투명한 방식으로 일을 풀어가겠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외교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주변의 야만적인 공세 때문에라도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투명한 방식과 절차로 일을 풀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래야 훗날 '뒷탈'도 없고 중간의 '리베이트'도 없다는 사실을 통일교본인 독일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

"부디 물러나는 늙은 대통령을 명예롭게 만들어 드리십시오. 그것이 인간적으로도 도리입니다. 그의 민족사적 헌신을 귀중하게 지켜드리십시오. 그것이 역사적 책무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책임은 자신이 나서서 감당하는 용기와 배포, 그리고 당당함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정치 지도자로서의 기량을 보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온정주의적인 '인간적인 도리'로서 기능을 다했던 역대 정권들의 부패에 국민은 이미 신물이 나 있다. '민족사적 헌신'을 가장한 역대 정권들의 말 잔치 역시 국민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다. 불법적인 '통치행위'들로 얼룩진 '책임'을 노무현 당선자에게 넘기는 행위 역시 노무현 당선자를 대통령으로 삼을 국민들이 용납하기 어렵다.

노무현 당선자의 정치적 자산은 결코 '온정주의'에 있지 않다. 민주당 내에서도 개혁대상이 될 구정치 세력은 눈물을 머금고라도 청산해야 한다. '개혁독재'라고 노무현 정권을 비난하면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당내세력을 비롯하여 '국민의 정부'에서 '국민'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부채는 최대한 털고 새롭게 가야 한다. 개혁으로 향한 갈 길이 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노무현 당선자의 정치적 자산은 '원칙과 정도'에 있었다. 그 스스로도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는 그 자산 덕분에 현재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에 있다. 일부 지지자의 반발이 무서워서 이제 와서 그 "원칙과 정도"를 배신하는 것은 그 자신 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의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묵묵히 정도(正道)를 걸어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역사의 평가'에 맡기는 마음으로 말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