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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국민 담화문 발표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비서실장, 임동원 특보가 회견도중 굳은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을 경청하고 있다.
지난 2월 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국민 담화문 발표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비서실장, 임동원 특보가 회견도중 굳은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을 경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그동안 개혁적 혹은 진보적 성향의 색채를 보여온 지식인들 사이에서 진상규명 불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민웅 목사다.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대북송금 진상규명 불가 입장을 개진한 바 있는 그는 18일 <오마이뉴스>를 통해 다시 한번 그같은 주장을 하고 나섰다. 다만 새로운 것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때에 김대중 대통령을 엄호해주지 못하고 있는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는 점이다.

현란한 여러 정치적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가 주장하는 바는 분명하다. "지금의 시점에서 대북송금 문제를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규명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장의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우리의 향후 외교 일체에 대응력의 약화와 신뢰성의 위기를 자초할, 외교사적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무지와 정파적 논리의 결과"이며, 따라서 "이 문제는 공개적 진상 규명이나 정치적 사법적 논란의 대상으로 삼을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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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러한가. 지금 대북송금의 진상을 밝히라는 국민의 요구는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무지의 결과이며 야당의 정파적 음모에 놀아나는 것에 불과한가. 김 목사의 주장이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장황하기까지 한 그의 주장 어느 곳에서도 '국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설명의 틀 속에는 냉전수구 세력도 있고 미국도 있고 노무현 당선자도 있지만, 정작 진상규명 요구의 주체가 되고 있는 우리 국민이 서있는 자리는 없다. 진상규명 요구는 오직 냉전수구 세력의 정파적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대북송금 의혹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국민들이 야당 혹은 '냉전수구 세력'의 정파적 논리에 휘둘리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민들은 대북비밀송금과 남북정상회담이 연계되었다는 의혹, 그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탈법 행위,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자신들에게 거짓으로 일관해왔다는 사실 앞에서 경악하고 있는 것으로, 지금 국민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나라의 주인된 입장에서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필자는 대북송금 문제를 판단할 핵심적 주체인 국민의 존재를 배제시키고 있는 김 목사의 논리에서, 김 대통령이 범했던 것과 같은 오류를 읽게 된다. 김 대통령이 범했던 가장 큰 잘못은 국민을 배제시킨채 민족의 앞길을 결정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국민에게 내용을 알리는 것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이해와 동의조차 구하지 않은 채 민족의 문제를 좌지우지하려 했던 것이다. 민족 문제에 있어서 정작 그 주체인 국민의 지위를 이같이 격하시키는 잘못된 시각이 김 대통령의 선택은 물론이고, 김 목사의 글 곳곳에서도 베어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을 할 사람은 결국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연다면 어디까지 열지, 열고 난 이후에는 세상속으로 나온 고통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판단은 국민의 뜻에 달려 있다.

김 목사는 노무현 당선자를 향해 "이런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자가 민족 전체를 뜨거운 열정과 선명한 논리, 그리고 자기희생적 헌신의 자세로 단결시키는 일이다 … 세계사적 안목과 민족사적 의지를 가진 감동적 설득과 합리적 설명, 존엄하고 진지한 자세로 이룰 수 있는 작업이다"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쉽게 말해 노 당선자가 나서서 국민을 설득하여 김 대통령을 엄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눈 앞에 엄청나고도 명백한 의혹이 쌓여있는데, 그리고 그것을 이대로 덮어주어야 할 필요성이 아직 이해가 되지 않고 있는데, 지도자 한 사람이 나서서 '국민들에 대한 절절한 호소'를 한다고 해서 국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김 대통령이 '통치행위'를 언급했던 것 이상으로 권위주의 시대의 관행에 젖은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국민들의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며, 노 당선자마저도 김 대통령과 함께 동반 추락하는 지경이 될지 모른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판단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한 그 아무리 민족의 대의를 구호처럼 말하더라도, 그로부터 제기되는 주장들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부정하며 과거의 통치관행에 젖어있는, 본질적으로 '수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황은 노 당선자에게 '사나이의 눈물'을 요구할 때가 아니다.

대북송금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과거의 낡은 통치관행이 낳은 결과였다. 국가적 대사(大事)를 위해서는 대통령은 초법적 지위에 있을 수 있다는 발상이 거기에는 깔려있었고, 국민을 배제한 채 민족의 앞길을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한 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외교에 있어서 비밀이 따르는 비공식 영역의 필요성은 분명하지만, 그 범위는 국민적 상식의 범위 내로 한정되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의 여건 마련을 위해 비밀송금을 했다면 그것은 국민의 상식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과거 정통성이 약했던 정권들이 북한과 밀사를 주고 받으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시대는 바뀌었고, 김 대통령은 당연히 시대의 변화에 맞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 했다. 국민을 배제시키고 비밀리에 몇 사람의 측근들을 갖고 민족의 문제를 결정지으려 했던 모습은, 밀실과 독과점으로 상징되는 3김정치의 폐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대북송금 사건은 우리의 시장 질서를 교란시킨 행위였다. 그토록 재벌개혁과 기업의 투명성을 외쳐왔던 정부 아래에서, 기업의 투명성을 훼손하고 정경유착의 냄새가 짙은 일이 정부 스스로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다. 거기에는 불법대출, 대출압력, 분식회계, 특혜, 국정원의 개입…. 우리 경제를 망쳐온 온갖 추한 광경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단 한 가지, 남북관계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민족의 문제를 위해 도대체 그같이 비도덕적이고 탈법적인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발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한 충정을 이해한다해도, 이같은 방법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북송금을 둘러싼 의혹의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국민이 이해하고 동의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덮어둘래야 덮어둘 수 없는 일이다. 김 목사는 진상규명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민족 내부의 논의와 협상의 내용을 그대로 밝히고 투명한 방식으로 일을 풀어가겠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어떤 정치적 이유와 동기가 있든 간에, 이 문제에 대한 자기를 던진 엄호가 있지 않으면 노무현 정권은 향후 남북관계나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있어서 막대한 어려움을 자초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김 목사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지 않는다. 양파 껍질 벗기듯이 진상이 하나씩 밝혀질 경우, 자칫 당장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부분에 관한한 판단할 아무런 정보와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도대체 진상속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있는 것인지, 들려오는 설(說) 이상의 확실한 정보를 갖고있지 못하기 때문에 김 목사의 우려가 현실적인가 여부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원론적인 수준에서 말한다면, 남북관계는 단기적인 안목에서만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남북관계의 중장기적인 발전을 고려하는 시야를 갖는다면, 지금 이 문제를 덮어두고 가는 것은 오히려 남북간의 불신,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킬 뿐이며, 장기적으로 남북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설혹 진상규명 과정에서 어떠한 악재가 추가로 더 나온다 하더라도, 어차피 딛고 넘어서야 할 일이지 피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와 관련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들은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회에서의 증언을 비공개로 하는 방식은 이미 제시가 된 바이지만, 이것으로 미흡하여 특검제를 도입할 경우 특검법에 특검수사시 비밀유지 의무조항같은 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보호해주어야 할 비밀이란 남북관계를 위한 것이지, 결코 현 집권 세력이나 현대의 안전을 위한 비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 또한 지금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밝혀지는 진상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다. 진상의 내용에 따라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필요할 수도 있겠고, 반대로 국가적 견지에서 사법처리는 하지 않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이에 관한한 불기소에 관한 정치적 해결의 길은 열어놓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김 목사는 "노무현 정권 수립을 지지했던 세력 일부가 노무현 당선자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 벌써부터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이는 "김대중 정권의 대북 송금과 관련한 노무현 당선자 자신과 노무현 진영의 자세에 대한, 실망을 넘어선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경악스러움이 한데 섞인" 정치적 발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다른 문제도 아닌 대북송금 문제 때문에 노 당선자로부터 등을 돌리는 지지자들이 그렇게 늘어나고 있는지 그다지 체감하고 있지 못하지만, 어찌되었든 김 목사의 말은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하는 진단이다. 노 당선자가 대북송금의 의혹을 이대로 덮고 가자는 주장에 동조했을 때, 그보다 몇 배, 몇 십배 많은 국민들이 등을 돌리게 될 것임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부디 물러나는 늙은 대통령을 명예롭게 만들어 드리십시오."

노 당선자를 향한 김 목사의 마지막 감성적 호소이다. 누군들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노(老) 대통령이 이런 지경으로 몰리며 퇴임하는 모습이 안타깝지 않겠는가. 노(老) 대통령의 말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남북관계를 위한 충정만큼은 분명히 읽을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깝다. 또 한 번의 국가적 불행이다.

그러나 안타깝다고 덮어두고 갈 수 없는 일이다. 차제에 남북관계의 투명성의 수준을 높이고, 다시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국민적 동의 수준을 높여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진상규명을 하자는 것은 단지 지나간 일을 파헤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며, 남북관계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김민웅 목사가 진정 민족의 앞길을 생각한다면 엉뚱하게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엄호에 나서지 않고 있는 노무현 당선자에게 화살을 겨눌 것이 아니라, 바로 김대중 대통령과 현대에 대해 국민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진상고백을 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순서요 상식이 아닐까.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 수록 국민에게 물어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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