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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축축한 독 속에서도 나보다 더 먼저 봄을 맞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독 속에서도 나보다 더 먼저 봄을 맞고 있었다. ⓒ 전희식
내가 놀란 것은 버리려고 독에서 꺼낸 강낭콩들이 제비새끼 주둥이처럼 샛노랗게 움이 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썩은 콩 깍정이는 콩이 움트기 좋게 영양분을 제공하고 있었다.

봄인 것이다. 봄이 온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이 기세등등하던 동장군이 쫓겨 가고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리어카에 오줌통이랑 거름을 가득 싣고 밭에 갔다가 바글바글한 봄나물을 발견하고 다시 정말 봄이구나 싶어졌다. 나는 올 해도 밭을 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 흙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른 고춧대를 하나씩 뽑아내다가 파릇파릇한 나물들을 엄청 많이 발견했다. 먼저 광대나물과 냉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맘때면 양지바른 곳에 무더기로 돋아 있는 나물이다. 아예 밭둑을 타고 앉아 나물을 뜯었다. 아니 뽑았다.

광대나물은 작고 동글동글한 잎이 도톰해 귀여운 어린애 볼 같다. 가을에 나기 시작하여 겨울 내내 죽은 듯이 지내다 이제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한다. 냉이와 광대나물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봄의 전령이다. 데쳐서 조물조물 무쳐 먹든지 된장 풀어 끓이면 뿌득뿌득 생기 돋는 소리가 날 정도다.

광대나물은 줄기가 왕성한 데 비해 뿌리는 가늘고 짧다. 그래서 맨손으로도 잘 뽑힌다. 반대로 냉이는 뿌리가 굵고 깊다. 냉이를 그냥 뽑으려다가는 뜯겨버린다. 겉잎은 누렇게 말라있고 속잎 줄기는 몇 개 안된다. 나는 금세 나물을 수북하게 뽑았다.

모든 들풀이 다 그렇지만 광대나물도 싹이 틀 때하고 한창 자랄 때, 그리고 꽃이 필 때는 영 딴판이다. 지금은 여리게 생긴 나물이지만 5-6월이 되면 30-40cm 나 되는 광대꽃이 되는 것이다. 광대처럼 불쑥 솟은 모양 때문에 이름도 그렇게 정해진 나물이다. 쑥갓도 꽃이 피고 나면 언제 저걸 내가 쌈 싸 먹었던가 싶을 정도로 쑥갓 나무가 되어 있다.

봄나물이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한창 벌여 놓은 채 창 틀을 보완할 나무를 다듬고 있다.
한창 벌여 놓은 채 창 틀을 보완할 나무를 다듬고 있다. ⓒ 전희식
봄나물들과의 재회를 반기면서도 아뿔싸 이 밭에 풀들이 뒤덮고 내가 씨름을 해야 할 여름도 곧 오겠지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올해는 시기를 절대 놓치지 않고 풀들을 잘 잡아내려고 한다. 귀농운동본부에서 공급하는 ‘풀밀어’라는 수동식 기계도 들여 놓을 생각이다. 지난달 정농회 총회자리에서 예초기에 달아서 돌리는 다중호미 얘기도 들었다. 긁어모은 가랑잎으로 밭을 두툼하게 덮어버릴 생각도 하고 있다. 단 하루만 때를 놓쳐도 풀 매는데 몇 배의 품이 더 든다.

햇살이 너무 따뜻해 작은 방 문짝을 뜯어내고 미루어 오던 창틀 보완작업을 시작했다. 기억자랑 대패랑 목공 톱 등 연장을 챙기니 아들이 뭐 도와 드릴까요 하면서 다가왔다. 나는 줄자와 기억자로 창틀 해 넣을 수치를 재고 새들이는 따라 다니면서 내가 불러주는 대로 쪽지에 적었다. 대패질을 할 때 내가 수수께기를 하나 냈다. 밑으로 먹고 위로 싸는 게 뭐냐고 물었는데 끝내 대답을 못했다. 새들이가 모르고 있는 수수께기를 하나 알려 준 셈이라 기분이 좋았다.

나물을 마당가 우물에서 곱게 앃었더니 냉이가 큰 것은 2-3년 된 인삼뿌리처럼 크고 튼튼하다. 뿌리가 가는 것이 광대나물이다.
나물을 마당가 우물에서 곱게 앃었더니 냉이가 큰 것은 2-3년 된 인삼뿌리처럼 크고 튼튼하다. 뿌리가 가는 것이 광대나물이다. ⓒ 전희식
일 서투른 방거치가 연장 탓한다지만 요즘 연장들은 너무 형편없다. 야문 참나무 문틀 작업을 하다보니 대팻날이 움푹움푹 빠지기 시작하더니 끌 파기 작업을 할 때는 몇 번 망치로 쳤더니 끌 날이 톡 부러져 버렸다. 새로 사서 별루 써 보지도 않았던 목공톱도 이빨이 나가는 것이었다. 일이 영 진천이 없다시피 꼬인다 싶더니 창틀에 올라서서 톱질을 하다가 톱이 튀는 바람에 왼쪽 엄지에서 피가 솟아 버렸다. 날이 나가버렸다고 투덜댔지만 이렇게 내게 앙갚음을 할 때는 날 빠진 톱도 살을 파고드는 데는 비수와도 같구나 싶었다.

새들이가 응급처치를 해 줘서 붕대로 묶은 채 작업을 계속했다. 벌려 놓은 일 오늘 다 못 끝내면 이장들 챙겨 넣고 다시 펼치고 하는 일이 너무 번거롭기 때문이다.

가장 난감했던 것은 유리칼이었다


한지 창 중간에 넣으려고 간유리를 자르는데 유리칼로 몇 번 그으니 유리칼 끝에 달린 다이어가 다 닳아먹어 버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낫도 그렇고 괭이도 그렇다. 호미도 휘거나 부러지기 일쑤다.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시내 재래시장에 있는 대장간에 가서 연장을 주문해서 만들어 써야 한다는 귀농 선배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고 혼자 남으니 앞 산 눈은 아직도 그대론데 벌써 봄이라니 싶다. 봄은 농부에게 희망인가 절망인가 시름이 몰려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고 혼자 남으니 앞 산 눈은 아직도 그대론데 벌써 봄이라니 싶다. 봄은 농부에게 희망인가 절망인가 시름이 몰려온다. ⓒ 전희식
해가 뉘엿뉘엿 할 때 옆집 할아버지가 손수레를 빌리러 오셨다. 마루에 앉아서 내가 내 놓은 감 홍시를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올해는 논 두어 마지기에 더덕을 심으시겠다고 한다. 쌀은 이제 마을 모든 사람들이 다 포기 해버리는 모양이다. 더덕 씨 1키로에 10만원이 넘는다는데 그래도 쌀농사 보다야 나을 것이다. 밭벼를 심을까 했는데 거기에 나도 더덕을 심을까 싶었다. 3-4년 키우면 쌀농사 보다야 몇 배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올 농사는 어떻게 지어야 할지 사실 막막하다. 새로운 귀농지도 발품을 많이 들였지만 여의치 않다. 돈 되는 환금작물보다는 쌀이나 잡곡류의 기초농사에 충실해야 한다는 평소의 다짐이 흔들린다. TV 위에는 농협에서 온 농자금 독촉 지로용지가 두개나 쌓여있다. 할아버지가 자시다 채반지 채 두고 가신 감 홍시를 노리고 까치 몇 마리가 집 앞 은행나무위에 내려앉는 게 보인다. 언제 나타났는지 눈에 익은 도둑고양이가 마당에 들어선다. 갑자기 걱정이 태산 같아진다.

시계를 쳐다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든다. 강원도 씨감자 신청을 한다. 올해는 작년보다 좀 더 심을 생각이다. 음력 이월 보름 안에 심어야 한다. 들뜬 마음으로 뜯어 온 봄나물이 소쿠리에 담긴 채 시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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