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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작품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책 속의 주인공이 작가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났으나, 그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예사 사람으로 실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나 보다.

글 중에서 특히 소설은 어디까지나 꾸민 이야기로 유능한 작가일수록 아주 능청스럽게 여러 형의 인물을 창조하여 세상사를 풍자하거나 비판함으로 독자를 울리거나 웃긴다.

몇 해 전, 설을 앞두고 민족문학작가회에서 공주 교도소에 복역중인 황석영씨 면회 가는 행사에 동참했다.

30여 분이 전세 버스를 타고 가는데 마침 남정현 선생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전에도 선생을 몇 차례 만나 뵌 적은 있었지만 의례 인사였을 뿐, 가까이서 속 깊은 이야기는 나눈 적이 없었다.

작가 ‘남정현’ 하면〈분지(糞地)〉를 떠올릴 만큼, 그 작품은 내가 대학 다닐 무렵에 필화 사건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65년은 한일협정을 둘러싼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월남 파병과 같은 문제로 정국이 어수선했다.

그해《현대문학》3월호에 실린〈분지〉를 용공 작품이라는 구실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작가 남정현 씨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에 한승헌, 이항녕, 김두헌 변호사가 변론을 맡고, 이어령, 안수길 문인 등이 변호인 측 증인으로, 검찰 측에서는 전향자와 구속중인 간첩까지 증인으로 채택하여 열띤 법정 공방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초미의 관심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두 해를 넘긴 후 1967년 6월 28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선고 유예로 판결이 났다. 그 동안 문인협회와 많은 문인들이 당국에 진정서를 내고 각 언론에서도 작가들만이 가지는 풍자와 비판,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두둔했다.

나는 그 무렵 이 작품을 읽고 작가 ‘남정현’이라는 인물에 무척 경외심을 가졌다. 작가의 기발한 착상과 현실을 뛰어넘는 신랄한 풍자 정신과 억눌린 사람의 한을 대변하고, 그를 정화시키는 용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활빈당 수령 홍길동의 10대 손인 홍만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 분이와 함께 해방을 맞지만 독립투사인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날 어머니는 미군한테 성폭행을 당하여 그 충격으로 미쳐 죽는다.

그후, 누이 분이마저 미군 스피드 상사와 동거한다. 누이는 밤마다 스피드 상사로부터 본국에 있는 부인과는 하반신이 다르다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과 학대에 시달린다. 만수는 스피드 상사의 부인이 한국을 찾아왔을 때 그를 유인하여 향미산으로 데리고 가서 겁탈한다. 이 사실을 안 미국 펜타곤 당국은 정예사단 병력과 미사일을 동원하여 향미산을 폭파하겠다고 한다.

만수는 자기 출신구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그러나 홍길동 정신을 이어받은 만수는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오히려 홍길동의 기적을 통쾌하게 재연시켜 저들의 심령을 뿌리째 흔들어 놓을 생각을 한다.

폭파 10초 전, 만수는 태극무늬로 아롱진 러닝셔츠를 찢어 만든 깃발을 스피드 상사의 부인 배꼽 위에 꽂을 결심을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는 마치 고대소설 《임진록》이나 《박씨전》을 읽는 듯했다. 강대국에게 늘 당하기만 하고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한 못난 백성이 너무 열 받은 나머지 좀 투덜거렸다고 그것도 당사자도 아닌 제 나라 사람이 잡아다가 족치는 것은 과민 반응이요, 강자에 대한 과잉 충성하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마치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속담처럼.

그 날 공주로 가는 차안에서 남 선생과 나는 눈발이 흩날리는 썰렁한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분지 필화사건 뒷이야기 등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 선입관과는 달리 그분은 새색시처럼 심성이 무척 곱고 여린 분이었다.

체구도 자그만 하고 인상도 여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마음씨 좋은 초로의 예사 할아버지였다. 그 즈음에는 도봉구 쌍문동에서 따님과 둘이서 지낸다는데, 따님이 직장을 나가기에 진지는 손수 차려먹을 때가 많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먼 길을 달려갔으나 공주교도소 측에서는 황석영씨 면회를 허락치 않았다. 더욱이 집단 면회는 안 된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다녀간 표시라도 남길 양으로 그 날 간 회원들이 각자 100원씩(1일 한도액 때문) 추렴하여 영치금만 맡기고 떠나왔다.

서울로 돌아오자 이미 어두웠다. 버스에서 내려 압구정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탔다. 댁이 쌍문동이라서 충무로에서 4호선을 갈아타고자 내리는 선생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대한극장 앞 한 한식집에 들르자 막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주인은 뒤늦게 찾은 손님을 쫓지 않고 정성스레 만두국을 끓여왔다. 따끈한 정종으로 건배하면서 미리 새해 인사를 나눈 후 만두국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충무로 역으로 내려가서 4호선 플랫폼에서 남 선생님을 배웅하고 나는 3호선 승강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곱고 여리고 목소리도 낮은 남정현 선생, 하지만 안경 속의 눈빛만은 더없이 강렬했다. 조국의 분단을 아우르고 통일을 앞당길 선생의 대작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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