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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청에 자리한 그의 일자리. 그는 이렇게 29년을 구두닦이로 살아왔다.
전남도청에 자리한 그의 일자리. 그는 이렇게 29년을 구두닦이로 살아왔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29년 구두닦이를 하면서 122차례의 헌혈을 해온 한대중(47)씨. 한씨는 지난 92년부터 전남도청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다. 추운 겨울 바람에 튼 것 마냥 갈라져 있는 손가락, 그 틈새로 구두약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저분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그런 손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보다는 '세상 아름다운 손'으로 비쳐진다.

헌혈에서 독거노인 돌보기까지

베푸는 데 스스럼없는 손을 지녔기 때문일 게다.

그가 자신을 손을 남을 위해 내밀기 시작한 것은 1979년 12월부터다. 당시 그는 광주우체국 앞 켠에 있었던 나라서적 입구에서 구두닦이 일을 하면서 이동 헌혈 차량에서 처음으로 헌혈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헌혈이 어느덧 100회를 훌쩍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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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헌혈은 이발하고 목욕하는 것과 똑같다. 잠시 저장해오던 식량을 쓰는 것 같은 기분이다. 기분도 좋아지고 이제는 습관처럼 느껴진다."
그가 말하는 헌혈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봉사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헌혈이 자기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끈'들을 이어주는 것도 헌혈이었단다.

그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뻤던 날"은 그가 다짐했던 헌혈 100회를 채우던 2002년 3월 12일이었다. 물론 기록을 세우기 위해 목표로 한 횟수는 아니다. "79년 6월에 제대를 했는데 그때 많은 방황을 했다"던 시절, '이웃 사랑'이라는 것과 함께 '마음을 다잡을 수'있는 계기를 만든 것이 그에게는 헌혈이었다.

"헌혈을 하다보니까 마음이 선해지고 자꾸 좋은 일을 하게 되더라. 헌현은 일석삼조다. 가치관이 바뀌고 이웃사랑을 실천했다는 뿌듯함이 생긴다. 이러다 보니 사람을 만나고 여러 가지 봉사할 일들이 주위에 생긴다."

그래서일까. 그는 헌혈에 멈추지 않고 백혈병이나 폐암 등에 걸려 수혈이 필요한 이웃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조건없이 자신의 헌혈증을 기증해왔다. 또 지난 99년 4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 장기 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대한적십자사는 2001년 '헌혈유공자 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 분의 할머니를 자신의 어머니 마냥 모시고 있다. 물론 날마다 그 할머니에게 들르지는 못한다. 벌써 이 할머니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한 지 10년째다. 그는 "내가 사는 동네 분인데 자식이 없어 혼자 살고 계신는데 별다른 것은 없고 가끔 용돈을 드리고 생활용품을 사다가 주고 있다"고 멋쩍어했다.

아침 7시경부터 그의 손에는 구두약이 묻기 시작해 최소한 저녁 9시는 돼야 하루 일을 마무리하는 탓에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아 자주 들리지는 못하는 것이 미안한 기색이다. 이런 그에게 도청의 한 공무원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마음이 넓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9년 구두닦이 속에서 피운 '향학열'

그는 베푸는데 스스럼없이 내미는 '아름다운' 손을 여전히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는 베푸는데 스스럼없이 내미는 '아름다운' 손을 여전히 간직하고 싶어한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집안 사정과 자신의 처지가 괴로워 가출도 해봤다는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이렇게 그는 세상을 보듬으며 29년을 구두닦이로 살아왔다. 한 직업치고는 흔치 않은 경력이다. 그가 구두를 닦기 시작한 것은 지난 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두닦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물론 '돈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그에게 '돈'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조건'이었단다.

"중학교 1년 때 기말고사를 보고 있는데 담임선생이 시험을 보고 있는 도중 갑자기 시험지를 빼앗아가는 일이 있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등록금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론 학교 문턱을 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중퇴'라는 이력을 갖게 됐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벽돌이나 기와장 등 건축자재 판매업을 하다 도산했던 때다. 이후 그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기는 보조로, 작은 아버지를 따라 건축일을 하면서 일을 배워갔다.

그런 그에게 옆 집에 살던 친구 녀석이 구두닦이를 함께 하자고 제안을 했고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단다.

구두닦이 29년의 경력은 그렇게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는 일을 하면서도 "하루에 영어 단어 30개 정도를 외웠다"고 한다. 3년만에 독립을 한 그는 공무원교육원과 한국전력 서부지점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더 안정적인 생활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공부'로 향했다.

그는 전남대 교육봉사회라는 단체에서 마련한 '용봉야학'에서 공부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시작해 81년 '고입자격검증고시'에 합격하고 87년에는 '대입자격검증고시'에 합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내가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12남 중 장남이었고 부모님이 결혼하기를 원해서 89년 10월에 결혼하게 됐다."

"도청 직원들은 우리 식구"

하지만 그는 지금도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지금도 아무 걱정 없이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고 싶다"는 그는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입학해 법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한대중 씨.
한대중 씨. ⓒ 오마이뉴스 강성관
애초에 법학에 관심이 많아 사정이 되었다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도전하고 싶어했던 그였다. 마흔 일곱의 1남 1녀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지만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굴뚝'같은 모양이다.

하루에 닦는 구두가 150여 켤레에 이르지만 언제 한 번 잘못 가져다준 구두는 없다. 그는 "아무리 뒤섞어 놓아도 금방 주인을 찾을 수 있다"며 "구두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구두를 보면 얼굴이 그려진다"고 말한다. 그는 도청 내 공무원 350여명의 구두를 손질하면서 두터운 인간관계도 맺고 있다.

도청 내에서 벌어진 일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 '마당발'이라고 불린다. 점심, 특히 저녁 식사 때면 그를 '모시려는' 직원들이 많고 반주라도 한잔 걸치면 속내를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소식통'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도청 직원들은 그에게 '한식구'가 됐다. 때문에 그는 경사는 몰라도 직원들의 애사는 빠짐없이 챙기고 있다.

"헌혈을 하면서 좋은 일들이 자꾸 연결된다"는 그는 오늘도 구두를 닦듯, 세상에 스스럼없이 내미는 손을 여전히 간직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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