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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를 성향별로 분류해 놓은 블랙리스트
ⓒ 이상호
그곳은 먼 곳이었습니다. 창원... 부산 옆에 있는 공업도시, 창원을 저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다녀왔습니다. 비행기로 40분이 채 안되는 가까운 거리었지만 그곳은 저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떠밀려 멀리 바다 끝으로 밀려난 섬이었습니다.

'분신노동자 배달호. 올해 51살. 노모와 여고 3년과 1년생 두딸 그리고 그만을 바라보는 아내를 남김. 두산중공업의 스카핑(대형 파이프 용접 전 작업) 국내 최고 전문가. 노조간부로 대의원으로 활동. 최근에는 교섭위원으로 회사측을 상대하며 좌절해옴. 지난 9일 새벽 6시 20분쯤, 사측의 가압류 철회와 해고노동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함.'

서울에서 사전 취재해간 그의 이력입니다. 마음 속 서푼짜리 양심에 이끌려 찾아간 창원 땅, 두산중공업 그의 빈소를 들어서며 저는 그간 닫혀있던 제 자의식의 물꼬가 일시에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애써 외면하며 그렇게 멀리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자본과 노동. 이 유전하는 대립을 저는 애써 남의 일인 양, 마치 제 자신이 천상의 심판관인 양 적당한 거리를 두며 그렇게 즐겨온게 사실이었습니다. 노동해방. 그말은 머리에 담고 입에 올리는 순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나마 주변부에서 기껏 쌓아올린 기득권 마저 포기해야할지도 모를 무서운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자본주변부를 위태롭게 걸어오며 순하게 길들여지고 있는 사이, 우리 사회 형제자매들은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에 하루 만큼 더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수렁 속에서 검거 타버린 배달호씨를 보았습니다.

지난 98, 99년 신자유주의질서가 온땅을 뒤덮고 노동운동 탄압의 새로운 기제로 이른바 '자본공세' - 월급, 퇴직금 가압류와 손해배상 등 - 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저는 대검찰청을 출입하는 기자로 이른바 신공안 정책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그야말로 역외자였습니다.

진형구 대검찰청 공안부장과 점심 폭탄주를 마시며 공기업 빅딜과 외자유치 현황을 점검하며 우국충절의 한가한 유희를 즐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신공안의 이면에 죽어나고 있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내재적으로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배달호씨는 무관심의 철벽 너머에서 두 눈을 감아온 제가, 자본의 미친 춤이 넘실대는 방파제 뒤편에서 느긋하게 안도해온 우리 모두가 죽인 것입니다.

공기업 민영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무리한 외자유치. 그 폐해에 대해, 굳이 변명하자면, 고민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상 위에서 나홀로 한 고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민은 항상 이론에 매몰돼 너무 추상적이었습니다. 문제는 풀리지 않을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배달호씨가 닫혀 있는 마음에 온몸으로 봉화를 피워올린 것입니다.

창원에서 사흘을 보내면서 저는 배달호씨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그가 남긴 두장의 유서를 품고 다니며 한자한자 다시 소리내어 읽어봤습니다. 그는 놀라우리 만큼 헌신적이고 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자신보다 남의 아픔에 더 민감했던 그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두려워 떨며 걸으면서도 이 시대 모순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은 이론 보다 위대했습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기자가 되었고, 또 기자를 하다보니 죽은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시대 기자는 '사회의 무당'이어야하나 봅니다. 제도가 죽이는 숱한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이 시대를 품을 수 있는 방법도 달리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죽었겠습니다. 그것도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그의 목소리를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 노조와해 공작이 적힌 수첩내용
ⓒ 이상호
배달호씨는 말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회사. 노동자의 입장보다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리자. 온갖 특혜를 통해 회사를 통째로 삼키고도 노동자가 살아갈 방도를 하나둘 빼먹는 자본가. 동지들을 규합해 거역해 보기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살인적 탄압 뿐이라고.

가혹한 형량과 처절한 자본의 보복. 삼대를 자본의 궤도에서 탈선시키는 신판 연좌제 '가압류.' 기자들은 자본가와 흐드러진 가운데 살섞기를 즐기느라 노동자들의 절규에 관심 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러나, 동료들은 탄압과 분열에 휘둘려 어깨조차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소주한잔 함께 할 동료들이 떨어져나갑니다. 어쩌겠습니까. 당신이라면 어쩌겠습니까.

사람처럼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최소한의 절규도 공허한데, 해고된 동료들을 복직시켜달라는 외침도 무위. 그럴수록 회사는 더욱 입체적으로 회유하며 달려듭니다.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으며 나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칩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죽을 각오라면 살아서 싸워야하는데...

그래도 내 한몸 죽어 시대의 어둠에 한 자루 촛불을 켤 수 있다면. 내 죽음이 새 생명의 물꼬를 틀수만 있다면. 라이터를, 라이터를 들어야지. 떨리는 손. 치떨리는 분노. 무너지는 가슴. 밀려오는 회한. 어머니, 딸들아... 사랑하는 당신.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그래 나는 간다. 들어라! 불꽃의 외침을... 동지들이여 끝까지 싸워 승리해주기 바란다.

1월 9일 새벽 6시 20분. 노동자 배달호씨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1월 17일 저녁 6시, 그가 죽은 두산중공업 민주광장에는 수백개의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그가 죽은 뒤 8일만의 일이었습니다.

두산중공업 노조와해 위한 '블랙리스트' 작성
일요일밤 < MBC 시사매거진 2580 > 심층 보도 예정

두산중공업이 노조와해를 위해 노동자들을 상대로 그 동안 정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 관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또 작성된 블랙리스트는 노동자들의 잔업 및 특근 등 근무배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 MBC 시사매거진 2580 >이 입수한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블랙리스트에는 노동자의 교우관계는 물론 출신학교, 고향, 여론주도 여부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개개인의 노조경력과 노조참여도가 상중하로 분석돼 표시되어 있다.

사측은 이같은 관찰 결과에 따라 노동자를 자립, 관찰, 주기적 관리, 지속적 관리, 방치 등 5단계로 나눠 관리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방치' 대상자는 상황 발생시 '해고' 대상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 적지 않은 파문이 예상된다.

이 문건에는 실제 블랙리스트 작성결과가 연장, 특근, 야근 등에 대한 불이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근무표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사측이 조직적인 노조와해 공작을 펼쳤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입수됐다. 지난해 파업기간 중 현장 관리직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수첩에는 사측의 노조와해 공작, 이른바 '선무활동'을 독려하는 김상갑 두산중공업 사장의 지시가 있었음이 적시돼 있다. 김 사장은 '관리직은 자기 직책을 걸고 노조 사수대를 빼낼 것'과 '선무활동 실적을 제출하라'는 지시도 함께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파업기간 중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수첩에는 00일보, 00신문 등 지방언론을 통한 사측의 언론플레이 계획이 드러나 있으며, '언론사에 친척이 있는 관리직은 회사에 보고하라'는 김 사장의 지시도 적혀있다.

이와 관련, 두산중공업 관리본부장 정석균 전무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노동통제를 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며 "노동자들을 성향별로 분리해 잔업이나 특근시 불이익을 준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다. 정 전무는 또, 지난해 파업기간 중 '사장이 직접 선무활동을 독려했다'는 내용이 담긴 수첩에 대해서는 "그런 수첩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떠한 내용이 쓰여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같은 배달호씨의 분신관련 사건 취재내용은 오는 1월 26일(일요일) < MBC 시사매거진 2580 > 프로그램을 통해 심층 보도된다. 또, 방송이 끝난 직후인 밤 10시 30분 부터 인터넷 고발뉴스 포털 www.Leesangho.com, < TV천인야화 > 코너에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이 출연해, 배달호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노동계의 입장과 향후 대처 방향에 대해 취재기자와 함께 이야기 나눈다. / 이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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