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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시대의 인간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제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참된 지식의 필요성을 설파한 바 있다.

"자네 말은 이런 것이지. 재산, 권력, 건강, 영예, 그리고 용기를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고.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런 것들이 유용하게 쓰일 때 그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유용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을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사람은 유용한 것을 가지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저 사용해서는 안되지. 올바른 사용법과 그릇된 사용법이 있을 테니까. 만약 목수가 연장을 잘못 쓴다면 재료를 버리게 되니 쓰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아닌가?"
"목수가 톱이나 도끼를 올바로 사용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악사가 연주를 잘하고, 조각가가 조각을 잘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자기 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말한 재산, 건강, 영예, 용기 따위도 그것이 있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이 참된 지식에 의해 올바르게 사용되어야만 선한 것이고, 만약 그것을 무지가 지배한다면 오히려 나쁘지 않겠는가?" (플라톤.《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일전에 동료교사들과 함께 노래방을 찾아 정태춘과 박은옥의 '떠나가는 배'와 김민기의 '가뭄' 그리고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의 노래를 부르다 보니 아름다운 시간은 깊어만 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를 불러 우리의 사랑을 아로새기려 했다.

그런데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한 곡을 더 신청했다. 그이는 '호걸' 또는 '풍류객'이란 별칭을 지닌 이로 덧배기나 힙합 등 온갖 춤사위에 부합하는 장단과 가락을 소화해낼 수 있는 취미(就美)의 인물인데 국악맛을 내는 현대성의 노래를 질펀하게 매겨나갔다.

혼자서 1만cc의 생맥주를 뚝배기로 부어마신 그인지라 목소리는 다소 파성이었지만 그의 정신은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기만 했다. 그의 가락과 사위를 도취한 듯 바라보고 있다가 모니터에 비친 관련정보를 접하고 적지 않게 놀랐다.

그것은 70년대 초 '미인'을 불렀던 신중현의 노래 '김삿갓의 금강산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양악풍의 노래를 즐겨 부르던 신중현이 어찌 희비감흥이 한 민족의 가슴을 부여잡는 듯한 저런 노래를 저렇게도 멋스런 음색으로 엮어낼 수 있다니…'란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하여 1997년에 취입한 음반 『김삿갓』을 어렵사리 구하여 해독하니 그의 음악이 다시금 가슴에 와 닿았다.

6.25로 인해 부모를 여의고 기타를 배우러 상경한 신중현은 현란한 기타 솜씨로 낮에는 음악학원의 강사로, 밤에는 미 8군의 밤 무대와 접촉하여 재즈와 팝, 록을 연주하며 그 무대에서 톱스타로 활동하던 중 미국인 음반회사의 취입 권유를 받아 처음으로 소위 가요시장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1962년 미 8군 무대에서 그는 처음으로 보컬 'Add 4'를 결성하여 브리티쉬 인베이션인 'The Beatles' 스타일의 서구 록큰롤을 소개했다.

그 후 1964년 그 자신이 라인업의 리더가 되어 '빗속의 여인'과 '커피 한 잔'을 담은 데뷔 앨범 '애드 4'를 출시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로큰롤 스타일에 대중적 트롯의 음률이 중합된 어쩌면 당대로서는 전위적 사운드로 드러났다. 하지만 65년 'Add 4'의 해체 후 무대 아래에서 홀로 작곡 수업을 오랫동안 한 후 69년 '덩키스', 70년 '퀘션스', 70년 '제로 악단', 71년 '캄보밴드' 그리고 72년 '더 맨' 등의 그룹 보칼의 활동을 했지만 그의 음악은 이 땅의 대중들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음악으로 펄 시스터즈가 부른 '임아'와 '떠나야 할 그 사람'은 68년에, 그리고 김추자가 부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69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싫어'와 '봄비' 등은 사이키델릭 사운드로 세인의 애착을 끌어내어 그의 음악적 실천은 소위 '신중현 사단'의 활동이라 평가될 정도로 부러움을 샀다. 70년 박인수, 송만수 그리고 임승훈과 함께 결성한 보칼 '퀘션스'가 연주했던 '봄비'는 단조의 유장한 멜로디를 지니고 있어서 이에 매료된 일본인 가요평론가 및 음반사의 유혹을 받기도 했다.

대중가요사의 경계시대(Marginal Period)라 할 70년대 초 '작곡 박춘석, 작사 정두수'의 트롯계의 노래가 기성인들로부터의 찬사가 집중될 때 '작곡 신중현'의 로큰롤 플러스 재즈 스타일의 사이키델릭은 젊은이들의 관심과 열광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때 신중현은 록 뮤지션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부각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신중현과 엽전들'이란 보컬의 리더 싱어로 무대의 전면에 등장, '미인'을 탄생시켜 대중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소위 인기 절정으로 태평성대를 즐기던 그에게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71년 10월 유신으로 재집권한 제 4공화국 정부는 음악의 대중적 영향관계를 고려하여 그에게 대통령을 위한 노래인 '대통령 찬가'의 작곡을 요청했지만 그는 '대통령 1인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조국 강산을 위한 노래를 짓겠다'고 완곡한 사의를 표했다.

그것이 바로 이선희가 부른 '아름다운 우리 강산'인 것이다. 이어 '74년에 그는 소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대마초 왕초'라 지칭되어 구속되고 그의 새로운 청년문화의 사이키델릭 음악들은 음치(音癡)들에 의해 가부장적 질서를 거부하는 퇴폐적 불온으로 비판되어 판매 및 방송의 금지 대상으로 낙인되었다가 '87년이 되어서야 해금되었다.

문제적 자아와 부정적 세계 사이의 대립과 갈등의 세월, 10여 년의 어두움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막을 수 없었던지 86년 개인 스튜디오 'Cafe Woodstock'에서의 음악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음반 『세 나그네』와 『무위자연』들은 그를 사랑하는 비평가들로부터 한국적 록음악의 완성작이란 평가를 끌어내게 했다.

그의 음악을 정위(正位)하는 록(rock)의 출발점은 AFKN이 지적하듯 서구의 J.Hendrix와 Butterfly 류의 로큰롤이었지만 종착점은 한국의 시나위나 판소리 류의 한국적 록이었다. 즉 그는 서구의 로큰롤을 한국적 록으로 변용한 셈이다. 이는 '97년 그가 결성한 밴드 '김삿갓'의 음악을 통해 확인된다.

그의 노래를 열창하여 히트한 인물들 15인이 작곡자 신중현에게 헌정한 앨범 『A Tribute to 신중현』을 열어보면 일렉트릭 기타와 로큰롤 기타의 사운드를 장 타령조의 전통 3박자와 오음계의 계면조로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삿갓 금강산 여행'에서는 제멋에 겨워 흥얼거리는 타령조의 전통적 창법을 계승하고 여러 트랙에서 꽹과리나 징의 소리가 연상되는 연주기법이 구사되며 국악의 느낌을 갖게 하는 기타 리프 그리고 사물놀이 마당 등이 노랫말을 돋워낸다. 방랑으로 천하를 주유하던 삿갓 김병연의 삶으로 표상되는 우리의 얼이 '김삿갓 금강산 여행'의 한국적 록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쯤되면 그는 과거의 록 아티스트(Rock Artist)라 명명되기 보다는 오히려 오늘의 가객(歌客)이라 지칭됨이 어울리지 않을까 여겨진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그의 음악이 사상과 정서의 뿌리가 되는 한(韓)으로 귀환하고 귀착됨을 두고 혹자는 '새 술은 새 부대에…, 힙합과 테크노가 지배하는 이 시대를 대응하지 못한, 즉 리메이크(remake)나 리데뷰(redebut)하지 못한 예술가의 단시적 반발의 음악세계'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음악의 모색은 '70년대 초에 발표된 가요 '미인'과 '산아 강아' 등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다. 이들은 록의 음악을 우리의 것으로 표현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는데, 그 리듬과 멜로디는 한국적 흥취의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라-솔-미-레-도'란 하강 오음계의 계면조에 타령조의 멜로디, 만가의 요령소리와 전통적인 북소리의 음색은 자연스럽게 여겨져 우리는 흥이 절로절로 나는 것만 같다.

하지만 '70년대의 젊은이들은 신중현의 '미인'을 감상하면서 단지 그 일렉트릭 사운드에만 매료되어 있었을 뿐,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 음률에 바탕한 우리 소리의 재현 또는 재창조를 시도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또한 당대의 전문적인 음악평론가들조차도 이 점을 주목하고 간파하지 못했으며, 작곡자이며 가수였던 신중현도 자신의 의향을 표명하지 않았다.

'70년대에 들어 경제개발계획의 실행 결과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보면 전근대의 농업사회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산업사회로 옮아가게 된 셈이다. 그러한 때에 궁핍한 우리의 축복받은 미래사회의 모델은 풍요로운 미국의 모습이었고, '청바지, 통기타 그라고 생맥주'로 요약되는 신세대의 청년문화 역시 미국의 문화를 모방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여겼다. 이와 같은 당대의 문화적 분위기 탓으로 '미인'의 전통성 회복 시도는 묻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아름다운 의도는 드러날 수 없었다.

그래서 '미인'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두고, 기성인들은 '미친 놈의 발악이라 비아냥'만 보였고, 신세대는 '열광만 있고 사유는 없는 노예들의 환호'만 질러댄 것이다. 둘은 모두 '미인'의 리얼리티(reality)을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연출한 것이다.그리고 대상을 올바로 알지 못한 어리석음을 범할 뻔했으니깐.

일전 노래방에서 신중현의 '김삿갓 금강산 여행'의 감상 경험은 실로 좋은 묵상의 화두가 된 셈이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다 흙만 여기도다.…"란 경구(警句)처럼 이는 신중현의 천재성을 다시금 음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한 존재의 수구초심(首邱初心)을 필자의 것으로 여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참된 지식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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