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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진 폼페이의 흔적
묻혀진 폼페이의 흔적 ⓒ 홍경선
시민포럼 북쪽의 베수비오 화산을 바라보고 있는 주피터신전은 주피터, 주노, 그리고 미네르바의 카피톨리네 3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라 한다. 하지만 과거의 웅장했던 신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화산의 뜨거운 용암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그나마 크기도 맞지 않은 6개의 코린트식 기둥만이 남아 터를 잡고 있을 뿐이다. 그 기둥마저 건들면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아직 발굴중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주춧돌이나 주피터상의 둔부와 같은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시민포럼 서쪽에 위치한 바실리카 역시 당시 법정으로 쓰였던 흔적은 그 자취를 감춰버린 채 그저 페허의 일부분으로 남아있었다.

네 개의 주춧돌을 밟고 올라간 재판소는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음습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 화산폭발로 인한 도시의 비극은 오늘날 이와같이 페허의 흔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AD 79년의 대재앙이 만들어낸 비극의 현장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누워있는 석고주형의 모습에선 고통의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화산재를 뒤집어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통스런 표정, 옷의 주름, 머리모양 등 방금전에 석고를 부어만든 것처럼 생생한 모습이었다. 화산폭발 당시의 악몽을 그대로 재현해낸 울부짓는 모습에선 왠지모를 연민마저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고통스런 표정아래로 무언가를 끌어안은 포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끌어안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 귀중한 물건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의 귀중품을 끝까지 품어야 했던 그들의 물욕이 결국엔 이와 같은 참사를 가져온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폼페이는 대폭 발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지진이 일기 시작했고, AD 63년부터 화산이 폭발할 징후를 보였다고 한다. 이미 당시부터 대참사에 대한 경고가 비일비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폼페이는 계속해서 번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모든 걸 포기하고 로마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무릉도원이자 안빈낙도였던 삶의 현장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사치와 문란이 극에 달해 현실에 대한 망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쾌락은 달콤한 것이다.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신은 공평했다.

달콤한 쾌락 뒤엔 뜨거움 속에 녹아드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던 것이다. 결국 인구 2만명 가운데 약 2000여명이 그 자리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베수비오 화산을 통한 하늘의 재앙은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대지진과 함께 모든 걸 녹여버리는 뜨거운 용암으로 이 도시의 모든 것을 덮쳐버렸다.

멀리 이집트에서도 관측되었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폭발은 이 도시에 단 한줌의 생명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묻혀버린 것이다. 건물은 다시 지을 수 있고 재화는 다시 모을수 있다. 여유만 된다면 쾌락은 언제 어디서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행할수 있는 삶은 하나뿐이다. 그 하나뿐인 삶을 그들은 포기했다. 미련 때문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기엔 남아있는 것에 대한 미련의 벽이 너무나 높았던 것이다.

결국 이곳에서 죽은 2000여명의 시민들은 미련의 벽을 넘지 못한 체 죽음을 맞이했다. 하늘의 재앙은 그깟 미련의 벽쯤이야 쉽게 허물어 버릴 수 있었다.

차도와 보도가 확실히 구분된 포장도로
차도와 보도가 확실히 구분된 포장도로 ⓒ 홍경선
쾌락의 끝이 비극적인 최후라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을 벗어나 다시금 폼페이의 유적지를 거닐었다. 여기저기 무너진 건물의 흔적과는 달리 도로는 예상외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돌로 완전히 포장된 도로의 양옆으론 오늘날의 보도 불럭과 흡사한 인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차도와 도로가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지금의 모습과 별다를바 없다. 또한 마차바퀴가 들어가기 좋게 돌을 설치한 흔적은 깊게 새겨진 흠에서 선명히 드러났다. 시가지 전체의 모습은 마치 바둑판을 그대로 대어놓은 듯 했다. 첨단문명의 시대를 살고있는 오늘날과 비교해서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당시 로마인들의 도로정비 실력은 뛰어났다.

이외에도 발굴을 통해 드러난 하수시설, 목욕탕, 시장,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은 2000여년이라는 시간차를 고려해볼 때 현대의 그것과 별차이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폼페이의 골목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폼페이의 골목 ⓒ 홍경선
이뿐만이 아니다. 폼페이유적 남쪽으로 가면 여름철에 오페라가 공연되는 대극장과 오데온 소극장, 그리고 원형경기장이 나오는데 이곳의 시설들 역시 지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1만 2000명을 수용하는 원형경기장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3층으로 된 건물의 계단을 하나하나 밝고 올라서면 타원형의 경기장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탠드와 출입구의 배치, 전망 등이 지금의 모습과 비슷했다. 단지 스탠드위로 자라난 푸른 잔디들이 오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줄 뿐이다.

경기장 위에서 바라본 폼페이의 전경이 아름답다.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아무렇지 않은 듯 폼페이시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고 그 위로 하얀 구름이 더 이상의 폭발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이 산 바로 위에 앉아있다. 높이 솟은 교회의 첨탑에선 금방이라도 종이 울릴듯했다. 햇살마져 따사로워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날씨를 선보이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열을 머금은 돌위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폼페이 유적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AD 79년 대재앙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의 잔재들이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다. 한 도시를 완전히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순간에 화산재로 덮어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신의 분노로 화산재에 뒤덮힌 폼페이는 이렇게 고스란히 그 흔적을 드러내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화산폭발은 이 도시의 재앙이었다. 도시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렸다. 하지만 오늘날 되살아나 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도시의 환생. 20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환생한 것이다. 결국 폼페이는 화산폭발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이렇게 역사적 교훈을 남겨놓았다. 폼페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역사의 흔적은 유적으로 남아 많은 인류·고고학적 문화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엔 인간의 허영과 사치의 끝, 곧 쾌락의 종말은 언제나 비극이라는 것이 담겨져있다.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원형경기장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원형경기장 ⓒ 홍경선
폼페이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뜨거운 햇살이 살을 태운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역사의 저편에 묻힌 폼페이의 과거처럼 나 역시 이곳의 흔적이 되어 언젠가 과거의 일부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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