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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눈 고스란히 맞으며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노인들에게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도 집 없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내리는 눈 고스란히 맞으며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노인들에게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도 집 없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 황예랑
지난 28일(토) 오후 2시, 1백여 명의 사람들이 서울 동작구청 앞 노상에 앉아서 목소리를 높이며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상도2동 재개발지역 철거민들이 동작구청을 상대로 주거권 보장과 함께 지난 5월에 경찰과 용역깡패가 철거민들에게 자행한 폭력 등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집회였다.

이 자리에는 2002년 한 해 동안 도시개발과 신자유주의 정책 등으로 소외된 다양한 도시빈민들도 함께 하고 있어 월드컵 한국의 부조리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었다.

"노무현 당선은 서민의 승리 아니다"

제대로 얼지 못한 채 내리는 차가운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앉아 있는 이들은 상도2동, 망포동, 안암동 등 도시개발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서울시의 철거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올 여름 주민들이 용역에게 폭행 당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TV에 보도돼, 대표적인 강제철거지역이 된 대전시 용두동의 철거민들과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기업에 맞서 노조 사수를 외치다가 해고된 한국 까르푸 노동자들도 있었고 청계천 개발을 이유로 서울시가 진행한 노점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한 고(故) 박봉규 열사의 죽음으로 1년 내내 서울시와 전쟁을 벌여온 노점상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동작구청 앞을 가로막은 전경들에게 항의하는 상도2동 철거민
동작구청 앞을 가로막은 전경들에게 항의하는 상도2동 철거민 ⓒ 황예랑
"한나라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사회당 중에 어떤 당이 여러분들 집 지켜줄 것 같아요? 도대체 우리는 어느 당을 찍어야 하는 거죠?"

이 자리에 초청된 민중가수 류금신 씨가 대선결과를 놓고 유권자들에게 뼈아픈 한마디를 던졌다. 언론에서는 노무현의 승리를 서민들의 승리로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 자리에 모인 서울시의 서민들은 민주당의 집권을 반겨하지 않고 있었다. 철거민은 여전히 강제 철거를 두려워해야 하고, 해고자는 외로이 복직 투쟁을 벌여야 하며, 노점상은 시청 노점단속반의 매서운 손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도시빈민들의 동작구청 앞 한풀이는 2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눈 녹은 물이 엉덩이에 스며들고 있었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은 집회를 마치고 동작구청에 들어가 불평등한 도시개발 정책에 항의하려고 했으나 여전히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말없는 전경들의 방패뿐이었다.

"2003년에는 주거권 꼭 쟁취하세요"

동작구청 앞에서 한바탕 한풀이를 한 이들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상도2동 철거지역 한가운데 만들어 놓은 골리앗 옥상의 제사상이었다. 28일은 곧 다가올 강제철거를 예감한 상도2동 철거민들이 마지막까지 싸울 생각으로 만들어놓은 골리앗에 처음으로 입주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골리앗 옥상에서 제를 올리는 상도2동 철거민들
골리앗 옥상에서 제를 올리는 상도2동 철거민들 ⓒ 황예랑
"자, 2003년에 투쟁 승리하실 분들 빨리 나와서 절하세요."

제주를 자임한 전국철거민연합 이영미 사무차장의 응원 소리에 철거민, 노동자, 노점상 등이 제각각 앞으로 나와 절을 하고 돼지머리에 돈을 꽂았다.

10여 미터 높이로 쌓아올린 건물의 옥상이라 눈까지 내린 날씨에 거센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건만 제사상에 절을 올리고 입안 가득 술을 담아 둘러싼 사람들에게 품어대며 박장대소하는 이들은 추위도 잊고 있었다. 돼지머리의 구멍구멍마다 상도2동 철거투쟁의 승리와 함께 자신들의 승리를 간절히 기원하는 도시빈민들의 정성이 가득 담겼다.

높이 솟은 골리앗에서 내려다본 상도동 일대는 이미 많은 집과 건물이 파괴되어 있었고 개발사업도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다. 앞으로 골리앗에 갇힌 채 살아가게 될 철거민들이 거대한 포크레인과 소방차 물세례에 맞서야 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날 도시빈민들은 상도2동 골리앗에 모여 2002년 연말의 밤을 한바탕 즐거운 축제처럼 보내고 있었지만 위험은 언제나 이들의 발 밑까지 올라와 있다. 매번 정권이 바뀌어도 서민을 향한 정책은 제자리걸음 수준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학생신문(www.e-unipress.com)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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