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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크리스마스는 호주에서 맞았다. 24일 아침 일찍 도착한 멜버른 공항,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맑고 푸른 하늘. 아이들은 계속 물었다. "엄마, 진짜 내일 크리스마스 맞아?"

이모네 집에서 하룻 밤을 자고 일어난 아이들,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여 있는 선물을 보더니 입이 벙긋 벌어진다. "와,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들이 호주에 온 걸 어떻게 아시고 선물을 여기까지 갖다 주셨지?" 지켜보던 어른들도 아이들 하는 양이 너무 귀여워 덩달아 얼굴에 웃음이 흐른다.

친정 식구들의 방문을 기다리며 조카들의 선물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동생 선물까지 준비해 놓은 언니 덕분에, 어른들도 선물을 풀어보느라 여념이 없다. 아홉 살 짜리 둘째가 흥분하여 제 언니에게 말한다. "언니, 정말 호주는 산타 할아버지도 부잔가봐. 어른들 선물도 다 주셨잖아."

일 년이 지난 지금, 아이는 더 이상 산타 할아버지를 믿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제 언니에게 아주 자세히 들었겠지 싶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나도 모르게 서운하고 섭섭하다. 동생이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니 5학년 짜리 큰 아이가 잘난 체하며 끼어든다. "이제 너도 좋은 시절 다 끝난거야. 산타를 믿을 때가 좋은 거다, 너!"

아이구, 이런 이런. 그래, 어쩜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산타를 믿어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타를 믿지 않으면 더 이상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은 없을 것이고, 가족끼리 선물 교환을 하자"며 수습에 나선다. 이렇게 우리 집 크리스마스는 일 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한테 어떤 선물을 줄까.

초등학교 6학년인 류와 모리, 하라는 같은 동네, 같은 반 친구이다. 할머니 장례식에 다녀온 하라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은 죽음에 대해 궁금해 하며 무서움증에 시달린다. 이 때,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혼자 살며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한 할아버지가 아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제나 저제나 혹시 돌아가시지 않을까 하며 아이들은 담벼락에 붙어서 할아버지 집을 감시하기 시작하고, 장보러 가는 할아버지의 뒤를 미행한다.

매일 술을 마시는 엄마, 늦게 들어오시는 아빠. 류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하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모리, 아빠에게는 다른 여자와 아이가 있다. 생선 가게 아들인 뚱뚱한 하라. 아빠의 뒤를 이어 생선 가게를 하고 싶지만, 엄마는 그러면 좋은 색시가 오지 않는다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신다.

여름방학을 했지만 중학교 입시를 앞둔 아이들에게는 공부 외에 다른 할 일이 없다. 학원 마치고 매일 할아버지 댁에 들르는 아이들. 할아버지는 누에콩같은 얼굴에 검은 점같은 눈, 갈색에 가까운 이, 아랫니는 한가운데 네 개만 남고 모두 빠져있다. 위에도 오른쪽 송곳니가 없다. 머리는 벗겨지고, 얼굴은 군데군데 검은 수염이 섞인 하얀 수염을 깎지 않아 지저분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할아버지 옆으로 한걸음씩 다가간다. 할아버지도 조금씩 아이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마지못해 집 주위에 널려 있는 쓰레기를 치웠지만, 나중에는 마당 가득 돋아난 잡초를 뽑고, 빨래를 널고, 망치와 페인트 통을 들고 집 손질을 한다. 그리고는 마당에 코스모스 씨앗을 잔뜩 뿌린다.

자신에 대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할아버지.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전쟁에 나갔다가 입은 마음의 상처로 다시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야요이 할머니를 찾아 나선다. 두 분 모두 잊었노라 답하시지만, 마음이 아파서 그러신다는 것을 아이들은 안다.

나흘 동안의 축구부 합숙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의 몸은 오랫동안 입어서 낡아빠진 옷처럼 편안하고 친근하게 그곳에 누워' 계셨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프지만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할아버지의 집은 헐려 주차장이 되고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 든든하다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이들. 짧은 여름방학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아이들은 문제가 생기고 고민이 있을 때, "만약 할아버지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평생 자기를 버리듯 홀로 살아온 할아버지.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살아가기 시작한다. 아이들 역시 조금씩 아픈 곳을 가지고 있지만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그 상처를 제대로 보고 치료하며 성장의 기록을 갖게 된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을까. 그것은〈여름이 준 선물〉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서로에게 사는 것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살아갈 용기를 주었기에.

이제 우리 아이들은 산타를 믿지 않지만, 아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산타이다. 행복하게 사는데 서로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선물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은 여전히 고민이다.

(여름이 준 선물 NATSU NO NIWA, 유모토 가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푸른숲,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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