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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오랜 세월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 관계였다. 신문의 역사도 비슷하고 신문사 사옥도 광화문 네 거리에서 서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말단 배달원까지 늘 경쟁했다. 지금은 조선일보 구독자가 제일 많다고 하지만 동아사태 훨씬 전인 1960년대에는 동아일보가 훨씬 많았다.

조선일보 계동 구역을 배달하면서 동아일보 배달원 김대식이와 매일 만났다. 배달 구역도 코스도 같았다. 신문이 나오는 시간도 비슷하기에 늘 앞서거나 뒤섰다. 우리는 서로 경쟁 관계였지만 몹시 친했다.

그는 늘 교복을 단정히 입었고, 궁한 티가 조금도 나지 않는 당당하고 의연한 자세였다. 같은 구역 안에서 배달원 사이는 좋지 않은 일이 많게 마련이다. 새로 이사를 오는 경우 서로 독자 쟁탈이 붙는 게 일쑤이고 확장지와 남는 신문을 처리하자면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와 나는 얼굴 찌푸리는 일이 없이 지냈다. 다른 구역에서는 상대를 누르고 골탕먹이기 위해 치졸한 짓 - 상대 신문을 파손하거나 빼돌리는 일 - 까지 하는 얘기도 들렸지만 우리는 그런 일이 일체 없었다.

또 독자가 상대 신문을 보겠다면 인계하지 않고, 상대 신문을 구해 몰래 배달하는 일이었는데 우리는 그럴 때면 곧장 상대에게 인계했다.

우리 배달원들은 이름 대신 서로 '동아' '조선' '한국'으로 통했다. 대식이를 통해 알게 된 바, 걔네 보급소가 여러 면에서 좋았다. 배달 부수가 많아서 수입도 좋았고, 배달원에 대한 사람 대접도 훨씬 좋았다.

걔네 보급소에서는 한옥 한 채를 통째로 배달원들의 숙소로 제공하면서 가난한 고학생들의 자취생활을 돕는다는 것과 월말 월초 수금 때는 특식으로 날마다 지금의 교보문고 자리에 있었던 복취루라는 중국집에서 계란 빵을 사다준다는 것, 다음달 8일까지 사납금을 마감하면 얼마간 특별수당을 더 준다는 등, 다른 보급소에서는 볼 수 없는 대접이었다. 하지만 학생이 아니면 배달원이 될 수 없고, 배달원 자리도 여간해서 나지 않는다니 별수 없이 부러워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신문배달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정작 배달보다 신문 값 받는 일과 새 독자를 늘이는 일이다. 200여 집을 수금하면 별별 집이 다 있다. 단 걸음에 주는 집은 일 할도 채 안 된다. 어떤 집은 25일, 말일, 내달 5일, 10일, 15일 날에 맞춰 가야 한다. 깜박 그 날을 놓치면 다음달에 오라고 한다.

또 어떤 집은 꼭 한두 달씩 늦게 준다. 아무리 사정해도 항상 배달원이 진다. 조금 심하게 독촉하면 내일부터 당장 신문 넣지 말라고 한다. 그 말이 배달원에게는 제일 무서웠다. 또, 제일 얄미운 독자는 신문 값을 깎는 경우다. 어차피 남는 신문이라 넣기는 하지만 그 집 배달료는 무료인 셈이다.

어떤 집은 주인이 신문 값을 매번 미루면 가정부가 돈을 대신 주기도 한다. 동병상련이랄까? 그들은 대체로 배달원에게 친절하고 여름날에는 주인 몰래 냉차도 한 잔씩 건네준다. 내가 2년 남짓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신문 값을 떼인 집은 부지기수였다. 내 편에서 지쳐서 포기해 버렸다.

이와는 달리 매우 드물지만 다달이 신문 값 외에 몇 푼 가욋돈을 쥐어주었던 집도, 매일같이 배달시간이면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수고한다"고 말해 주는 분도 있었다.

재벌 집이나 명사 집들은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신문 값도 문틈으로 영수증과 맞바꾸지만, 일반 서민 집은 집안 방문 앞까지 배달하기에 아주 친해진다. 어떤 집은 신문은 끊고 싶지만 학생 때문에 못 끊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여름날에는 세숫물을 떠놓고 땀을 닦게 했다.

신문배달원에게는 신문이 늘 몇 부씩 남았다. 그 남는 신문 값은 배달료에서 공제된다. 신문보급소에서는 그런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다행히 그 달에 새로운 구독자가 생기면 손해를 면할 수 있지만 독자가 이사를 가든지, 독자가 끊어버리면 그 부수는 남게 되어 그만큼 배달수입이 줄어든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한 달 열심히 배달하고서도 수금해서 입금시키고 나면 빈털터리가 될 때도 있었다. 배달원의 수입은 신문대금 중 일정액을 입금시키고 나머지를 가지는데 한꺼번에 목돈이 되질 않고 푼돈이 되기 마련이다. 수금 마감 일은 다음달 8일까지인데 그 날을 넘기면 수금 수당을 공제 받지 못하기에 자기 돈을 대납하기도 했다. 마감 일까지 받지 못한 집은 대체로 끈질긴 집들이라 푼푼이 들어오는 돈을 잘 모아야 학비와 생활비를 할 수 있었다.

매달 하순 무렵에는 확장지란 명목으로 10여 부씩 나온다. 그 기간 중 구역 내에 읽을만한 집에 무료로 넣어 새 독자를 확보하는 일인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월초가 되면 보급소에서는 배달원 사정도 묻지 않고, 몇 부씩 일방으로 유가지로 계산해 버린다. 보급소의 이런 횡포에 우리 배달원들은 분개했다.

배달원 한 녀석이 확장지와 배달하고 남는 신문에 대한 부당함을 써서 각 신문사 독자란에 여러 번 보냈다. 그 후, 우리들은 여러 날 독자란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그 글은 끝내 어느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다. 신문은 다른 이의 비리나 항의의 소리는 잘도 싣지만 자기네의 비리는 한 마디도, 시정조치도 없었다. 자칭 사회 목탁이란 신문조차 보급소 편이지 배달원 편은 아니라고 우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겨울 날 새벽 배달 길에 대식이는 나에게 언제 복학하느냐고 물었다. 3월에 한다니까 마침 자리가 났다고 하면서 석간배달 후에 자기와 보급소에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집에 가서 꼭 교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럼 교모라도 꼭 쓰고 오라고 일렀다.

그 날 나는 주뼛한 마음으로 교모만 쓰고 갔다. 나는 대식이가 학교에 다닌다고 말하라는 당부와는 달리 보급소 소장에게 사실대로 휴학 중이라고 말했다. 소장은 돋보기 너머로 한참 내 몰골을 살피더니 특별 대우라면서 3월에 꼭 복학한다는 조건으로 채용하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계동 구역을 사흘만에 인계하고서 동아일보 누하동 구역으로 옮겼다. 동아일보 세종로보급소는 청진동에 있었는데 본사와는 매우 가까웠다. 석간이 나올 때는 조금이라도 빨리 배달하고자 신문사 운송 차량을 기다리지 않고 배달원들이 본사 발송부로 가서 윤전기에서 갓 쏟아진 뜨끈뜨끈한 신문뭉치를 등짐으로 날라 나눠가자고 구역으로 나갔다.

그 무렵 그 보급소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배달원이 60여 명에 2만 부 남짓 배달했다. 배달원 중 절반 가량은 시골에서 올라온 고학생들로 보급소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자취 생활을 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났다. 처음으로 내게 신문배달 길을 안내했던 덕수상고 이정식도 다시 만났다. 나도 그 보급소에 있으면서 학급친구들을 끌어들였다. 구본우 목사, 노진덕 전 해군제독이 그들이다. 그들은 가난할 때의 친구로 내 '조강지우(糟糠之友)'라 하겠다.

가난하면서도 당당하고 의연했던 김대식, 정말 다시 만나보고 싶은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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