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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의 산실 베이징영화학원, 문혁이후 5세대를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중국 영화의 토대가 되고 있다
중국영화의 산실 베이징영화학원, 문혁이후 5세대를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중국 영화의 토대가 되고 있다 ⓒ 영화학원홈
요즘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수단으로 상한가를 달리는 것이 드라마다. ‘야인시대’를 비롯해 고려의 영화를 담은 드라마, 또는 역사적인 인물을 다룬 드라마 등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비록 드라마나 영화 등이 역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학자들의 기록과 달리 극적 구성이 중시되기 때문에 때로는 왜곡될 수 있지만 영상물은 역사를 재구성해내는 흥미로운 수단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영화 역사는 제법 오래됐다. 프랑스의 영화 선구자 뤼미에르 형제가 1890년대 이 신기한 발명품을 가지고, 중국의 베이징이나 톈진, 광저우, 난징, 상하이에 와서 촬영하거나 상영했기 때문이다. 슈테판 크라머의 ‘중국 영화사’에 따르면 1896년 뤼미에르 영화사가 촬영을 위해 상하이에 도착했고, ‘아기의 식사’나 ‘종업원의 외출’ 같은 영화를 상영했다.

이후 중국인들 역시 서서히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1920년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상업영화의 옹호자들로 한 1세대가 탄생했다. 2세대는 더 나가 예술성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성향이나 좌익성향을 띠게 된다. 3세대는 40년대 이후 공산주의 영화를 만든 이들을 일컫고, 4세대는 50년대 말에서 문혁이 있었던 60년대 전에 학업을 마친 이들을 일컫는다. 하지만 4세대는 문혁으로 인해 70년대 말에나 비로소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중국 영화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한 5세대는 1978년에 다시 문을 연 베이징 영화학교를 졸업한 이들을 가리킨다. 예술적인 능력으로 인해 명성을 얻는 장이모(張藝謨)나 천카이거(陳凱歌), 황젠신(黃建新) 우톈밍(吳天明), 톈좡좡(田壯壯)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은 역사와 예술세계를 예술적 감수성으로 결합시켜 중국 영화의 수준을 순식간에 업그레이드 시켰다. 6세대는 개방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영화의 꿈을 키운 이들이다. 장위엔(張元), 지아장커(賈樟柯), 장밍(章明), 로우쉐창(路學長), 왕샤오수아이(王小帥), 로우예(婁燁) 등은 소재나 표현에서 한층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후에 2000년에 들어서는 소외받는 사람들과 소외받는 문화(시, 예술) 등에 관심을 갖고 창작 활동을 벌이는 또 다른 감독군이 형성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감독 가운데 역사적인 내용을 영화의 소재로 차용한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2세대 가운데 좌익영화를 만든 이들, 60년대 이후 사회주의 중심의 역사극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5세대는 영화의 소재로서 역사를 삽입시키는 기능을 한 세대다. 중국 영화는 홍콩 영화에 비해 소재에서 부자유스러웠지만 역사가 그들에게 준 중압감을 생각할 때 당연한 결과였다. 홍콩 영화는 그런 점에서 역사를 소재로 사용하는데 약간 능숙했다. 또 대만의 후샤오시엔(侯孝賢) 등 역사의식이 강한 감독이 태어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중국의 영화사보다는 중국 영화에 소재로 등장하는 역사를 순차적으로 보면서 영화와 역사의 상관관계를 살펴 흥미를 더하는데 의의가 있다.

진시황에서 목란까지

장이모의 <영웅>. 진시황영화의 기본 골격은 대부분 시황제와 자객들의 이야기다
장이모의 <영웅>. 진시황영화의 기본 골격은 대부분 시황제와 자객들의 이야기다
중국 영화에서 차용된 역사적 인물로 가장 오래된 인물이 누굴까. 전국시대의 인물인 ‘금의위’를 배경으로한 영화가 있지만 영화사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일반에게 가장 알려진 영화 속 인물로는 BC 246년부터 210년까지 재위한 진시황일 것이다. 진시황을 다룬 첫 번째 거작은 중국과 홍콩의 합작으로 1989년 만든 <진용 秦俑>이다. 무술영화의 대가중 하나인 청샤오둥(程小東) 감독이 훗날 대감독의 반열에 오른 장이모(張藝謨)와 우톈밍(吳天明), 그리고 여전히 중국 최고 여배우의 위치를 차지한 궁리(鞏俐)가 같이 한다. 진시황이 자객에게 위협받을 때 우연히 목숨을 구해진 몽천방(장이모 분)과 황녀 동아(궁리 분)의 사랑을 중심으로 진시황은 주변적인 역할을 한다. 불노장생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몽천방과 동아의 윤회속에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역사적 의식보다는 로맨스가 중심이다.

반면에 1995년 저우샤오원(周曉文)이 감독한 <진송 秦頌>은 진시황을 확실히 부각시킨 영화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배우로 꼽히는 지앙원(姜文)이 진시황제로, 거요(葛优)가 뛰어난 음악가 고점리(高漸離)로, 쉬칭(許晴)이 고점리를 사랑하는 진시황의 딸 역양(櫟陽)으로 출연한다. 앞 글 ‘진시황’을 다룬 글에서 밝혔듯 현대에 진시황은 폭군의 면모와 더불어 중국 통일과 갖가지 제도를 정비한 위정자로서의 면모를 같이 평가받기 때문에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고점리와 갈등을 겪고, 잔악한 폭군의 면모를 보이지만, 스스로 하늘이 되려다가 좌절하는 그의 모습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5세대의 거장인 천카이거(陳凱歌)가 1997년 <형가자진왕 荊軻刺秦王>으로 다시 진시황을 살린다. 일본과 홍콩, 중국의 거대한 자금은 물론이고 궁리, 장펑의(張丰毅), 리쉐지엔(李雪健). 왕즈원(王志文), 자오번산(赵本山), 저우쉰(周迅) 등의 참여했지만 흥행과 평가에서도 처참한 결론을 맺는다. 진시황과 그를 살해하려는 자객 가운데 하나인 형가를 소재로 했지만 갈등을 제대로 대비시키지 못하고,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넣으려다가 실패한 경우다.

하지만 천카이거로 추락된 진시황의 인기는 2002년 말 같은 5세대 감독으로 친구이자 라이벌인 장이모가 화려하게 부활시킨다. 진시황과 그를 살해하려는 자객들과 갈등, 또 자객들간의 갈등 및 사랑을 교차시킨 이 영화는 리롄지에(李連杰) 량자오웨이(梁朝伟), 장만위(张曼玉), 천다오밍(陈道明), 장즈이(章子怡) 등 중화권 최고의 배우들을 동원해 흥행과 예술적 평가 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진시황 다음 시대에서 인기를 끈 역사 소재는 삼국지연의다.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280년 사마씨의 후손이 진(晉)을 세울 때까지 위촉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을 배경으로 한 ‘삼국지연의’는 영화에서도 수없이 되풀이 됐다. 1905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영화 <딩쥔산 定軍山>도 삼국지연의에서 세 장면을 뽑아서 만든 영화다. 경극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전설적인 경극배우 탄신페이(譚鑫培)가 황충(黃忠) 역을 맡았다. 하지만 ‘삼국지’나 ‘수호지’, ‘서유기’, ‘홍루몽’, ‘금병매’ 등은 워낙에 방대한 이야기여서 영화로 담기에 부적절했고, 더러 다루어지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가치를 빛냈다.

월드디즈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뮬란. 그녀는 북조시대 목란시의 주인공으로 49년 중국에서도 영화화됐다
월드디즈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뮬란. 그녀는 북조시대 목란시의 주인공으로 49년 중국에서도 영화화됐다
다음 시대의 인물로 인기를 끈 이는 5세기 무렵 북조(北朝)의 남장 여인 목란(木蘭)일 것이다. 북조의 악부민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목란시’(木蘭詩)에 등장하는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한 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인물로 중국 고대시가 가운데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와 더불어 양대 시가로 꼽히는 걸작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삶은 1956년 류궈치엔(劉國權) 감독이 <화목란 花木蘭>을 만들면서 영화화되고,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 Mulan>으로 화려하게 세계 무대에 데뷔하기도 했다.

소림사, 양귀비, 징기스칸 등 종종 소재로 반영

이후 중국 역사는 수당, 5대10국, 송, 원, 명, 청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시기는 아직까지 중국영화에서 그다지 인상적인 작품을 갖지 못했다. 수에서 당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배경으로한 영화로는 리롄지에(이연걸)의 데뷔작인 <소림사 少林寺 1984>가 있을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건국 전 위기에 몰렸을 때, 소림사의 승려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리롄지에뿐만 아니라 중국 무술을 영화의 전면에 등장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 현종의 사랑을 받았던 양귀비는 이야기 속에서 항상 주도권을 잡았지만 막상 영화의 소재로 사용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 무측천(武則天)의 삶은 소재로한 <무측천>과 <양귀비>를 만든 리한샹(李翰祥) 감독 정도가 이 시대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뒤 중국은 5대 10국으로 분열되었다가, 송(宋)나라에 의하여 다시 통일되었다. 그리고 12세기 말에는 징기스칸이 중국을 비롯한 중앙 아시아와 인도, 유럽을 정복하면서 대제국을 세웠다. 징기스칸을 소재로 한 영화는 상당히 많다. 가장 최근 영화로는 1998년 홍콩에서 제작한 <징기스칸>을 비롯해 <일대천교 징기스칸 一代天驕 成吉思汗> 등 적지 않은 영화가 제작됐다. 징기스칸 영화의 경우 대부분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천하를 호령하는 그의 영웅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나 홍콩에서 제작한 영화의 경우 몽골인으로서 징기스칸을 다루기 보다는 중국 영토를 넓히고, 훗날 중국에 문화적 교화하는 방향으로도 많이 유도하고 있다.

명대는 극적인 인물이나 사건이 그다지 많지 않아, 드라마나 영화로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했다. 명대의 마지막 인물인 정성공(鄭成功)이 비교적 환대를 받는다. 명나라 관리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초기인물이다. 1636년 누루하치가 청을 세운 후에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명나라의 복원을 꿈꾸던 인물이 있었다. 순치제 때부터 아버지를 통해 그를 회유하는 한편 강희제가 재위한 1661년 청나라가 연안 5성(省)의 백성을 내지(內地)로 옮겨 그와의 관계를 두절시키는 천계령(遷界令)을 폈다. 그럼에도 그는 타이완(臺灣)을 공략하여 새로운 기지를 확보하고, 항청복명(抗淸復明)과 대륙 반격의 강화를 기도하였으나 다음해 급사하였다. <정성공>이 영화화되는 것은 한족 중심의 중국사에 자존심을 살린 경우이기 때문이다.

청 시대의 소재는 영화로 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많은 빛을 봤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환주꺼거 還珠格格>는 청나라를 부강시킨 강희황제(재위 1661∼1722)를 중심으로 한 영화다. 또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의 ‘녹정기’를 영화화한 <녹정기 鹿鼎記>역시 강희황제의 암살을 둘러싼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환주꺼거가 아니라도 강희황제를 소재로한 드라마가 중국 텔레비전에서 끝나는 날이 없다할 만큼 그는 중국 역사 사극의 중요한 인물이다. 영토확장 사업을 위해 천하를 주유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 학문에도 깊은 열정을 보인 황제여서 다양한 이야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인 서태후를 대룬 영화들도 몇차례 만들어졌다. 중국 인물영화의 대가 리한샹이 만든 <서태후>를 비롯한 영화들이 많다. 또 서국 제국주이 세력이 급속히 밀려든 청말도 중국 영화사에 중요한 소재가 됐다.

씨에진(謝晉) 감독의 <아편전쟁>을 비롯해 중국과 홍콩에서 만들어진 <황비홍> 등이 이런 상황을 소재로 적극 채택하고 있다. 1839년부터 벌어진 청나라와 영국의 갈등이 전쟁으로 번진 후 중국에게 무력적인 개항의 발판이 된 아편전쟁은 이 영화 외에도 당시 흠차(欽差:全權)대신으로 강하게 저항한 임칙서(林則徐)를 중심으로 한 <임칙서 1959>등 다양한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후에 리롄지에를 스타로 등극시킨 <황비홍>의 전작인 <황비홍전 黃飛鴻傳>이 1949년 후펑(湖鵬) 감독의 손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1851∼1864까지 14년간 존속했으며, 한때는 중원을 장악했다할 만큼 큰 세력을 태평천국을 소재로한 영화 <태평천국>과 드라마 <태평천국>도 있다.

청말중초는 계속해서 영화화

영화 송가황조. 쑨원, 쿵상시, 장제스와 결혼한 3자매로 중국 현대사를 풀어낸다
영화 송가황조. 쑨원, 쿵상시, 장제스와 결혼한 3자매로 중국 현대사를 풀어낸다
조악하나마 1905년부터 영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대의 역사를 소재로한 영화는 이 시기부터 만들어졌다. 어떤 소재도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만큼 역사는 영화 등 문화, 예술의 하부구조에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살펴보자.

당대는 아니지만 훗날 20세기 초반을 소재로한 영화도 종종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송가황조>와 <마지막 황제> 일 것이다. <송가황조>는 중국 근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쑨원, 꿍상시, 장쩨스에게 시집간 송씨 3자매를 배경으로한 영화로 이 가문의 굴곡을 통해 근대사를 잘 조명한 영화다. 베루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는 청조의 황제에서 일본이 세운 괴뢰 만주 정부의 황제를 지내다가 말년을 맞는 부이의 삶을 통해 현대사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1920년대 후반부터 중국에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좌파영화가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 중국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봄누에 春蠶 1933>이 태어났지만 좌익적 성격의 초기영화로 가장 명성을 얻은 작품은 비극적 배우 란링위(阮玲玉) 주연의 <신녀 神女 1934>다. 우리 성악기 윤심덕과 닮은 비극적인 삶은 산 그녀가 주인공을 맡은 <신녀>는 매춘부가 벌이는 삶의 투쟁을 보여주는 영화로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후에는 역사기록와 홍보 영화에 가까운 <옌안과 팔로군 延安與八路軍 1939>를 비롯해 적지 않은 역사영화가 탄생한다. 물론 슈테판 크라머의 평처럼 당시의 영화는 “이데올로기와 정치화, 사회화를 표방하는 일방적인 설교가 되어 버렸으며 그 동안 이룩한 모든 예술적 성과는 짧은 기간안에 하향 평준화 된” 경향이 뚜렷하다.

황하절연.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비행사와 팔로군여병의 사랑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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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80년 이후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는 국공합작시대의 경험이나 일본과의 전쟁 등을 담은 천 카이거 감독의 <황토지 黃土地 1984>, 펑샤오닝(馮小寧) 감독의 <황하절연 黃河節戀 1999> 등 적지 않은 영화가 있다. 황토지의 경우 1939년 샨베이(陝北)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통과 공산주의의 만남을 다루고 있고, 황하절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추락한 미군 비행기 조종사와 팔로군 여성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모옌의 소설을 각색한 장이모의 <붉은 수수밭 紅高粱 1987>도 원작에 비해 투쟁성이 덜하지만 한 농촌에서 벌어지는 항일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공산화 이후 모든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야했던 만큼 이런 경향은 더 짙어졌다. 하지만 좌파영화의 갈래상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왕빈 감독의 <백모녀 白毛女>가 1950년에 만들어진다. 하지만 문학이 그러하듯 영화가 사상 검열의 수단이되면서 감독들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인물극으로는 적지 않은 수의 마오쩌둥 영화가 만들어지고,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등에 관한 영화도 만들어진다. 이런 영화들은 1920년대부터 당대까지 이런 인물들의 삶이나 역사의 정점인 대장정(大長征)을 중심소재로 해 만들어졌다. 반면에 1962년 사망한 레이펑(雷鋒)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레이펑 雷鋒 1964>도 성급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개방으로 활기 찾은 영화

장이모의 <인생>.  중국 현대사를 관류하는 이들의 삶으로 역사를 잘 사용했다
장이모의 <인생>. 중국 현대사를 관류하는 이들의 삶으로 역사를 잘 사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덩샤오핑 시대의 개막은 영화계에도 큰 빛을 비추었다. 1978년 베이징영화학원(北京電影學院)이 다시 문을 열었고, 난닝(南寧)과 창사(長沙)에도 새로운 촬영소가 설립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5세대 감독이 들어서면서 중국 영화계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문혁은 곧바로 영화의 소재에 중심으로 떠올랐다. 위화의 소설을 각색한 장이모의 <인생 活着>이나, 톈좡좡(田壯壯)감독의 <푸른 연 藍風箏 1993>, 천 카이거의 <패왕별희 覇王別姬 1993> 등이 이런 대표적인 영화다. 하지만 위 영화들은 껄끄러운 문혁을 바로 다루기 보다는 국민당 시대부터 당대까지를 파노라마식으로 펼치면서 문혁을 마지막에 위치시켜 독자들의 공감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톈좡좡은 작업금지 조치를 받는 등 탄압이 따랐다.

그래도 문혁에 가장 밀접하게 접근한 이가 <햇빛 쏟아지던 날들 陽光燦爛的日子 1994>을 만든 지앙원(姜文) 감독이나 <부용진 芙蓉鎭 1986>의 씨에진 감독일 것이다. 소년의 성장을 통해 문혁시대의 광기를 보여주는 <햇빛 쏟아지는 날들>이나한 마을의 갈등으로 문혁의 상황을 보여주는 <부용진>은 밝음을 통해 문혁에서 벗어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후 일어난 1989년 톈안먼 사태는 아직 영화의 소재로 사용하기에 많은 금기가 있어서 소재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장이모 감독의 <국두 菊豆 1990>를 비롯해 이 사건 이후 만들어진 상당수 영화는 이 사건을 심리적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이후 6세대 감독들은 정부의 간섭이 심한 역사에서 소재를 찾기 보다는 개인의 삶에서 소재를 찾는 것을 중시했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넣지 않은 대신에 그런 역사를 관류하던 인간의 심리를 간파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에서 탈피한 작가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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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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