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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민주당사 3층 소회의실에서 노무현 후보가 참모들과 TV 합동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2일 민주당사 3층 소회의실에서 노무현 후보가 참모들과 TV 합동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필자 이진씨는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밀착 동행 취재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장시간 단독 인터뷰를 한 뒤 지난 달 초 <노무현의 색깔>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글은 세간에 알려진 노 후보의 몇 가지 긍정적·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재해석의 성격을 갖고 있다.

몇 개월 동안 노 후보를 밀착 취재했던 이씨는 "그의 알려진 이미지 속엔 몇 가지 중요한 오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민주-국민통합21의 극적인 후보단일화를 통해 1강2중 구도에서 1대1 양자 대결의 주체가 된 노무현 후보를 재검증해보자는 의미에서 그의 글을 싣는다. 이번 글의 주제는 지난번 (상) 노무현의 이미지에 이어, (하) 문화의 총체적 변화이다.

기사에 나오는 노 후보의 코멘트들은 별도로 출처를 밝혀 놓은 것이 아닌 한, 이씨가 노 후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왔던 것들임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때로는 도망가고 싶다"

노무현 후보는 스스로를 두고 "대통령에 미치지 않았다"고 한 적이 있듯이, 그 직업 자체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집권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양으로 잴 수 있다면 그의 것은 여타 많은 정치인, 심지어 초선 의원들의 내심보다 작을 지도 모른다.

"정치를 항상 그만두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한쪽 구석에 담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희망 보따리를 두 개 갖고 다니죠. 언제나 승리하는 정치를 꿈꾸는 희망 보따리 하나, 언제나 패배해 버리고 싸움에서 이탈하고 싶은 욕망 하나…."

두 개의 보따리 중에서 만약 이탈하고픈 보따리를 들고 정치판을 떠나버린다면, 그가 하고 싶은 일은 갈등 관계를 조정하고 중재하는 로비스트를 해보거나 언론의 제자리 찾기에 일조하는 언론전문 변호사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두 가지 모두 소위 '정치판'에서 그동안 그가 겪었던 많은 일들과 무관하지 않았던 듯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들고 있는 보따리는 '승리하는 정치'를 꿈꾸는 보따리이다. 김구 선생보다 링컨에 눈을 뜬 이유도 그의 승리한 정치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눈을 뗄 수 없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처럼 7개월 동안 숨막히는 '생존 경쟁'을 치른 뒤 본선을 목전에 둔 노 후보의 '노심' 속에서 그 두 보따리가 얼마나 무게를 서로 떠넘기며 갈등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럼에도 결국 여기까지 왔다. 왜 노 후보는 그 한 보따리를 더 부여잡고 있을까?

인터뷰를 위해 노 후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싶은 이유를 두 가지로 들었다. 하나는 엘리티즘(elitism) 극복을 통한 차별 없는 사회 실현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역주의(localism) 극복을 통한 국민통합이었다. 군사독재 시대로부터 두 차례의 민간 정부를 거쳐 제대로 민주주의가 토착하고 통일된 사회로 가는 중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것이 그 두 가지 그릇된 '이즘'이라는 것이었다.

"한 정치인, 한 권력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하는 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그것들을 극복하고 난 뒤에 나오는 그 다음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세계 초일류 강대국으로 자리잡게 하는 강력한 통합 리더십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 질서 속에서 늘 약자일 수밖에 없던 과거와 중심국가로 자리잡는 미래의 교두보로서 자신의 역할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즘'을 그가 어떻게 극복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성을 원했던 나와 그의 대화는 다소 겉도는 면이 있었다. 나는 '데블즈 에드보킷(devil's advocate)'을 자처했다. 거듭 그에게 엘리티즘과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슬로건이 당선을 위한 대중 추수주의와 역지역주의 전략은 아닌가, 물었다.

1일 경남 사천 시외버스터미널앞에서 연설을 마친 노무현 후보가 시민들이 전해준 지역특산물 쥐치포와 멸치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1일 경남 사천 시외버스터미널앞에서 연설을 마친 노무현 후보가 시민들이 전해준 지역특산물 쥐치포와 멸치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노무현 흔들기'의 배후는 엘리티즘이었다

먼저 엘리티즘을 보자.

노 후보의 경력을 보면서 나부터도 새롭게 깨달았던 사실은 고졸이 사법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는 것과 역시 고졸이 국회의원도 하고 대통령 후보까지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노 후보는 그것을 '도전했다'고 표현했다.

'도전할 수 있다'와 '신청할 수 있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도전은 능동적인 것이고 신청은 수동적인 것이다. 도전하는 것은 누구나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신청하는 것은 '자격'에 대한 선별 과정이 끼어 들기 때문이다.

나이·학력·성별 제한은 조직에서 능력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을 거른다. 고졸이 사법 시험도 치고, 대통령 후보도 '신청할 수 있는지' 몰랐던 것은 그만큼 나도 우리 사회에서 제한하고 있는 자격을 도전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소리이다.

아마 이 나라 주요 언론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최악의 보도물'은 학맥과 인맥, 거기에 혼맥까지 포함한 정기적 계보 발표였는지도 모른다. 실제 그런 것이 존재한다 할 지라도 언론에서 인쇄하여 자세히 보여주는 그 '족보'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청 권한'을 스스로 한정짓게 만드는 데에 막대한 역할을 해 왔다.

노 후보는 엘리트 사회에서 고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변호사가 되는 것으로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왕따 경험은 사법 연수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같은 대학 출신들끼리 모이는 바람에 한동안 혼자 점심을 해결했던 그를 마침내 무리에 끼워 준 사람들과 그 후로 오랜 연분을 쌓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현상은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지난 7개월 동안 민주당 내에서 벌어졌던 '상상초월' 분열의 근원에 노 후보의 '깜량'론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어깨를 좀 많이 움직이며 걷는다거나 스킨십이 부족하거나 하는 등 표면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측근들의 믿음이다. 그들은 학력·학연의 문제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믿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 후보를 보좌해 왔던 이강철 조직특보는 그가 정치인들 사이에서 학력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다면서 "심지어 민주화운동하던 시절에 운동권 내부에서도 학력 차별이 있지 않았나요?" 했다.

미움과 증오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오로지 DJ가 싫어서 민주당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민주당 내 엘리트 집단에게도 노 후보를 도무지 대통령으로 '모실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살아온 행적에 대한 폄하, 곧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상위 가치를 지녀온 전통적 의미에서의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던 그의 삶과 비교적 짧은 정치 경륜 등은 상대적으로 가시적 공과가 큰 동료 의원들로부터 "노무현이가 어떻게…"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게 사실이었다.

1일 경남 진주 중앙시장에서 노무현 후보가 연설중인 연단에 시민들이 두고 간 '희망돼지' 저금통.
1일 경남 진주 중앙시장에서 노무현 후보가 연설중인 연단에 시민들이 두고 간 '희망돼지' 저금통. ⓒ 오마이뉴스 권우성

비록 DJ도 상고 출신이지만 그는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운동 수십년 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3김 이후 정치 세대들 중에서도 특히 민주당계 의원들 중엔 일류 대학, 민주화운동, 감옥살이라는 민주당쪽 정통 코스를 밟은 사람들이 수두룩한 판이니 80년대 초반에 겨우(?)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를 가방끈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끈도 짧은 사람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6·13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와 8·8 보궐선거 때에 노 후보가 후보 공천에 있어서 자신의 입김을 거의 전혀 발휘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던 듯했다. 8·8 보궐선거에 참패한 것을 두고 노 후보는 공천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과 당의 의견이 맞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은 상향식 공천을 통해 유능하고 미래가 있는 사람을 미리 찾아내고 그들이 2004년에 이길 수 있도록 돕자는 주장이었던 반면에 당에서는 여전히 하향식 공천이 더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정치판에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다. 무명 인사라 할지라도 학자로서 변호사로서 또는 뭐 기업가로서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왜 그들을 발굴해서 적극적으로 국민을 설득하려 해 보지 않는가"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던 반면에 공천은 내부에서 알음알음으로 진행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는 노 후보에게 혹여 엘리트 자체를 거부하는 반(反)인텔렉추얼리즘은 없는가, 물었다.

"말하자면 저도 엘리트입니다. 그러나 엘리트의 특권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특권의 구조 속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가자, 하는 것을 인생과 정치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한 그는 "엘리트 구조 속에서 이것을 뚫고 최고의 권력을 쟁취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 많은 사람들의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준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분출하는 자신감에 의해서 한국의 엘리트 구조가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지금 우리 사회의 두터운 엘리트주의와 실제로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노무현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말들이 농담이 될 수 있지만, 노무현이 말하면 농담이 될 수 없습니다. 지적의 대상이 되거든요. 왜? 고졸이니까."

노 후보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에 대단히 솔직했다.

"또, 그동안에 소위 노동현장이라든지 막노동판이라든지 해서 정서적으로 엘리트주의와 맞서 있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거든요. 비주류잖아요. 얼마나 많이 부딪칩니까? 이 부딪치는 장벽을 뚫고 내가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변화이다. 그 자체가 혁명입니다."

11월 25일에 노 후보가 얻은 '재신임'도 작은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경선 불복과 당내 혼란, 탈당, 국민통합 21과 엘리트 재벌 정몽준 씨의 바람으로 인해 곧 사그라질 듯하던 노 후보의 불씨가 재 점화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노 후보가 말하는 '하나의 변화'가 두 개, 세 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부산에서 승리하면 국민통합 이루어진다

지역주의는 '원시적 유대감'에서 비롯된다고들 한다. 그만큼 깨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표로 여지없이 보여주는 지역주의의 고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깨질 수 있는 것일까.

노 후보의 오래된 참모들은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부산으로 갔다"는 말에는 사실 과장이 약간 있다고들 고백(?)한다. 물론 더 안전한 지역구로 출마할 우선권도 있었던 그이지만, 민주당 명함을 들고 부산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그 위험도만큼 승리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입지도 커지는 '노무현식 승부게임'의 장이기도 했다.

지난 11월 30일 부산역 광장에는 노무현 후보의 연설을 들으려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11월 30일 부산역 광장에는 노무현 후보의 연설을 들으려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또, 부산은 늘 여론 조사를 하면 경쟁력이 있던 곳이었다. 그는 선거 때마다 30% 포인트를 웃도는, 당선 가망성이 많은 후보였지만 선거 직전 자신이 속한 민주당에서 부는 악재 때문에 고배를 마셔왔다. 95년 선거에서도 승리를 낙관했던 그는 DJ의 지역등권론이 나오는 순간 하루아침에 지지율이 7 % 포인트 하락하면서 패배를 하고 말았다.

노 후보가 그 당시 낙선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차안에서 자신의 참모와 나눈 이야기는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노 후보의 생각을 잘 표현해 준다. 지역 등권론 때문에 부산에서 졌으니 당연히 DJ가 원망스러운데 그럼에도 차마 그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라도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번 대선에서도 우리가 DJ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선거 운동하러 다녀야 되겠지?"
"거, 뭐, 의원님 팔자 아닙니까?"
"하아,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거 참... 전라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자 참모는 콧날이 시큰해지며 "의원님이 선택하신 길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했다. 노 후보는 당시를 "생각해 보면 막막했던 때"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92년 대선 때에 선거가 끝난 뒤 "광주의 하늘이 시꺼맸다"는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노 후보로 하여금 지역주의 극복에 더욱 강한 신념을 갖게 했던 듯하다. 그는 "우리가 소위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지금 그들을 외면하다가 나중에 어떻게 손을 내밀겠느냐? 나중에 손 내밀 때에 '예전에 내가 도와주지 않았느냐'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었다.

노 후보의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똑같다. 지도자로서 힘의 균형(balance)을 맞추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는 만약 경상도가 그런 지역주의의 희생자였다면 똑같이 그들을 위해 일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 이 시기에 자신이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부분이 지역감정의 극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노 후보는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민주당 내 경선에서 이인제씨의 색깔 공세를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지역감정 때문이었다는 견해를 들어보면 이렇다. 노 후보의 한 측근은 "DJ는 호남사람이어서 빨갱이가 된 것이다. 영남인은 DJ가 싫은데 호남사람이어서 싫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빨갱이로 몬 것이다. 색깔론은 지역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12월 대선에서 혹여 노 후보의 색깔론이 다시 제기된다 하더라도 그가 방어할 수 있는 힘은 전라도가 아닌 경상도 사람이라는 데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번 선거가 흥미로운 것은 월드컵을 통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레드 컴플렉스가 거의 없어졌고, 선거에서도 색깔공세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리라는 여론 조사 분석 때문이다. 이인제씨가 민주당을 탈당하며 가진 기자 회견에서 "급진과격 세력의 집권연장"이라는 표현을 빈 것도 색깔론의 되풀이인 듯 보이나, 노 후보가 '급진 과격의 덫'에 걸릴 확률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7개월 동안 당내 '노무현 흔들기'가 입증한 사실은 그가 DJ의 적자도 아니고, 민주당의 '귀염둥이'도 아니고, 노무현 개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당내에서 조직과 계보와 돈이 없었던 노무현 개인일 뿐이라는 말이다.

3김 중 2김은 대통령을 해 보았고, 다른 1김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떻게 명예롭게 정치 전방에서 빠지게 되는가가 주안점이 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들의 시대를 휩쓸던 지역주의와 레드 컴플렉스 중 후자는 놀랍도록 빠르게 색깔이 바래진 것을 보았다. 남은 것은 지역주의이다.

대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노 후보는 부산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자신을 "돌아온 새끼 사자"라고 표현한 그는 부산 시민들에게 자신이 국민통합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득한다.

DJ도 집권 초기 국민통합을 주창했지만 결국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노 후보는 딱 잘라 말했다.

"실패했으니까 다시 시도해야지요."

단일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주요 당직자들이 11월 25일 오전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단일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주요 당직자들이 11월 25일 오전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이 원하는 것은 총체적 문화의 변화이다

상징성. 노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므로 해서 생기는 가장 큰 변화는 '문화의 변화'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선거 자체가 그렇게 변하는 경향은 뚜렷하다. 지역간 대결보다는 세대간 대결의 양상이 커지고 있고, 이념적 대결보다는 "깨끗한 정치"를 누가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인물론에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노 후보는 노무현이라는 가난한 농사꾼 집안 아들이 어렵게 학교를 다니고, 그런 뒤 도전하여 변호사가 되고, 도전하여 대통령이 되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인 "엘리트주의와 패거리 문화"로부터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청와대 안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국민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대화 프로세서'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영삼씨가 대통령 하면서 금융 실명제 하나가 온 세상을 뒤엎어 버렸지 않습니까? 이처럼 기본이라는 것이 중요하지요. 몇 가지 개혁 과제를 이야기 하는 것 이상 마구 일을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한 그는 "노무현 같은 평범한 사람이 대통령 되는 세상"을 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역주의 극복의 문제는 앞으로 남은 20여 일 동안 "생생하게" 국민들의 생각을 드러내 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예측하는 것에 매우 조심스럽다. 그러나 엘리티즘에 관한 한 이미 변화를 실감한다. 7개월의 교훈 때문이다.

4월에 노 후보가 후보가 되자 가장 당황했던 사람은 이인제씨가 아니었다. 노 후보와 평소에 밥 한끼 같이 해 본 적이 없던 우리나라의 엘리트층 지도자들이었다. 학연과 지연의 범주 안에서 늘 함께 "밥을 먹는 사이"인 정치계·언론계·경제계 인맥에 노 후보가 들어 있지 않았던 탓이다. '노무현 흔들기'의 배경에 "감히 노무현이 어떻게…"라는 생각을 했던 이들이나 지금도 "도대체 어떻게 노무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엘리트층 지도자들은 상황 변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노무현 현상"을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두 주 후에 대통령이 되든 안 되는 엄청나게 커져 버린 "변방 정치인, 노무현"의 입지는 학연, 지연의 고리 속에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자발적 지지에 의해 성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유의미성이 큰 까닭이다.

김경재 의원이 노-정 단일화 타협을 보면서 "unbelievable"을 외쳤다고 하는데, 그것이 감격의 탄성이었다면, 지금 이 나라 엘리트층 지도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unbelievable" 탄성은 감격보다는 기존 상식에 대한 파열음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의 색깔>의 저자 이진씨.
<노무현의 색깔>의 저자 이진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만약 노 후보를 배타적으로 보는 이들이 선거에서 노 후보를 이기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급선무는 "노무현 현상"을 좀더 신중히 보는 것일 것이다. 노 후보를 민주당의 일부나 기존 정치권 패턴 중 하나로 보지말고 노무현 개인으로 보고 대응전략을 짜야 한다는 말이다.

3김시대의 장이 닫히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집권하던 시기 사용되어졌던 집권을 위한 모든 정치 툴(tool)의 폐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노 후보가 자신의 몸을 통째로 던질 때마다 자꾸 커지는 것은 3김시대에 그 라인에 서기에 안주했던 이들에게는 없었던 새로운 '툴 사용법'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주장하는 '문화의 변화'가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때문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진씨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불름버그 통신사와 IRE, 웨스턴 켄터키 대학 국제 언론·미디어 경영 트레이닝 프로그램 등 주로 미국 언론 기관에서 일해 왔으며, <노무현의 색깔> 등 다섯 권의 저널리즘 에세이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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