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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시의 현재는 오늘의 과거가 된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문명의 흔적, 즉 과거의 역사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비록 세월이 흘러 빛 바랜 영광이라 할지라도 직접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변함없는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빛과 마주하기 위해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던 내게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의 빛을 선사한 나라는 동남아시아의 동 중국해로 뻗어나온 인도차이나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캄보디아였다.

캄보디아의 씨엠립은 앙코르 왕국의 근거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곳이다. 600km에 이르는 지역 내에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지어진 100여개의 사원들은 강력했던 앙코르왕국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부 사원들은 크메르루즈의 약탈과 파괴로 많이 부서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웅장한 모습과 섬세한 조각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 앙코르유적군. 그 신비에 쌓인 베일을 벗기기 위해 역사의 장으로,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로 향했다.

▲ 사원의 도시 '앙코르왓'
ⓒ 홍경선
새벽 5시 30분. 일출을 보기 위해 앙코르왓으로 향했다. 주위는 아직 지난밤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질 않고 있는지 고요했다. 고요한 새벽을 깨우고 있는 것은 나처럼 이국땅의 이방인뿐이었다. 깜깜한 새벽, '사원의 도시'라 불리는 앙코르왓에 첫발을 내딛는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원안은 일출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저 멀리 양 옆으로 길다랗게 늘어선 건물이 보였다. 한눈에 앙코르왓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멀리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사원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한걸음 한걸음 침묵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멀리 숨어 있는 입구를 향해 미지와 신비, 그리고 고요한 새벽의 침묵 속에 서서히 다가간다. 거대한 사원이 내뿜는 신비로움이 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다. 입구 쪽으로 길게 늘어선 '나가'의 부서진 흔적이 왠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나가의 등에 기대어 사원을 바라본다. 조용한 아침의 잠을 깨우듯이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저 멀리 붉으스름한 기운이 앙코르왓을 감싸기 시작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원의 도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5개의 첨탑은 무한한 신비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사원을 감싸고 있는 붉은 기운은 이내 사라지고 그렇게 앙코르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일출과 함께 앙코르의 향기를 잠시 맛본 뒤 앙코르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인 앙코르톰으로 향했다.

앙코르왓의 예술적 가치는 다른 군소 사원들을 모두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공기를 가르며 달려가는 상쾌함이 온몸을 적신다. 앙코르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양옆으로 활엽수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하늘 높이 뻗은 그 크기는 고대도시의 비밀을 한층 더 두껍게 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후 자야바르만 7세의 불교성전 앙코르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앙코르왕조의 마지막 도읍지 '앙코르톰'
ⓒ 홍경선
힌두교 사원의 유일한 불교군인 앙코르톰. 영화 '톰레이더'의 배경이자 '앙코르의 미소'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불상군을 형성하고 있는 커다란 도시이다.

권력기반이 약했던 자야바르만 7세에게 '불교'는 그의 권력기반과 집권배경을 확고히 다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국민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는 통치자, 당시 부처는 곧 자야바르만 7세 그 자체였다. 신과 왕은 하나, 신왕사상에 입각한 통치가 이처럼 거대한 유적을 탄생시킨 것이다.

▲ 나가를 잡고 있는 선신들
ⓒ 홍경선
남쪽 문으로 들어가는 길 정면에 우뚝 솟아 있는 고푸라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입구 양 옆으로는 악신과 선신들이 각각 9개의 머리를 부채처럼 펴들고 있는 나가를 무릎 위에 받쳐든 채 긴 난간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남문을 통과한 후 길게 늘어선 활엽수림의 환영을 받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바욘사원에 들어갔다. 먼저 빛의 위치와 밝기, 길이, 방향 등에 따라 천의 얼굴로 변한다는 거대한 얼굴조각들이 낯선 이방인을 맞이한다. 부리부리한 눈, 넓적한 코, 미소짓고 있는 두툼한 입술, 개인적인 소견으론 참 못생겨 보였지만 그 미소가 워낙 인상깊었기에 나름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했다.

모두 54개의 탑에 200여개의 큰바위 얼굴이 새겨져 있는 사원은 1층부터 그 파괴의 흔적이 역력했다. 태국의 수코타이에서 느꼈던 그 허망함이 또 다시 느껴진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옛 번영의 흔적은 이렇게 무너진 돌덩이에서나마 그 빛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유적에는 정교하리만큼 치밀한 묘사로 아름답게 춤추고 있는 압쌀라 무리가 남아 있다.

하나, 혹은 두세 명의 무희들이 다양한 자세로 요염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들의 매끄러운 몸매를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매혹적인 무희들에게 유혹을 느끼며 2층으로 올라가니 큰바위 얼굴들이 반갑다고 미소짓고 있다. 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미소에는 왠지 모를 위엄이 섞여 있어 사원이 주는 경건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의 길다란 회랑은 당시 백성들의 일상생활, 신화, 전쟁 등이 양각부조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조각미가 상당히 뛰어나다. 표정 하나 하나에서부터 병사들의 무기, 전투장면, 옷차림 등이 마치 그림처럼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 앙코르톰 회랑을 장식한 전쟁장면
ⓒ 홍경선
그렇게 바깥회랑을 휘돌면서 간혹 하늘을 바라보면 여전히 웅장하면서도 우후죽순처럼 서 있는 고푸라 속의 큰바위 얼굴이 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회랑의 주변에는 여기저기 무너져내린 돌덩이들로 가득했다.

갖가지 문양이 새겨진 그 돌들을 바라보니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새긴 게 아니라 조그만 바위 하나하나에 조각을 내서 퍼즐 맞추기 형식으로 완성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바욘사원의 큰 바위 미소를 뒤로한 채 하늘 위의 왕궁이라 불리는 '피미아나까스'(Phimeanakas)로 발걸음을 옮겼다.






▲ 매혹적인 압쌀라 무희
ⓒ 홍경선

▲ 사방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큰바위얼굴
ⓒ 홍경선

덧붙이는 글 | 잃어버린 황금의 도시 잉카제국에 버금가는 동양의 앙코르왕국. 
2002년 1월에 시작한 40일간의 동남아시아 7개국 여행 도중 캄보디아의 씨엠립에서 베일에 쌓인 그 신비로움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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