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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안 양지아링의 장정 기념관. 대장정의 도착지에 자랑스럽게 그 기억을 회고해놓았다
옌안 양지아링의 장정 기념관. 대장정의 도착지에 자랑스럽게 그 기억을 회고해놓았다 ⓒ 조창완

친일의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장악해 여전히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것처럼 대우받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지만 상하이의 번화가인 난징루(南京路)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탕루(馬當路)의 중간에 자리한 임시정부 청사는 훗날 동강난 우리 역사를 지탱해줄 역사의 현장으로 언제나 우리 관광객들에 의해 붐비고 있다. 그러나 우리 여행객들은 그 임정청사 바로 옆에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쉽다.

중국 역사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공산주의가 태동한 ‘중국공산당 제 1차 회의장소’(中共一大會址)가 바로 그곳. 우리 임정청사에서 2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1921년 7월 23일 마오쩌둥, 리따(李達), 동삐우(董必武) 등 13명의 대표가 모였다. 공산당 창당대회는 프랑스 경찰에게 발각되어, 곧바로 저지앙(浙江) 지아싱(嘉興) 난후(南湖)의 배로 옮겨져 치러진다. 당시만해도 이 회의가 중국 역사를 뒤집어놓을 맹아였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이렇듯 미약하게 시작한 중국 공산당은 약 4반세기만에 중국사를 바꾸는 힘으로 성장했다. 곳곳에 등장한 변혁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의 출발기와 성숙기를 여행한다.

준이회의터. 이곳 회의에서 마오쩌둥 등은 중국 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준이회의터. 이곳 회의에서 마오쩌둥 등은 중국 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 조창완

난창 봉기, 영웅들이 모일 자리를 만들어주다

상하이의 한 골방과 지아싱의 호수에서 곡절 끝에 태동한 중국 공산당이 성장하는데는 몇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지만 이 속을 살펴보면 사람들간의 갈등과 우정이 역사를 변화하는 가장 미세한 부분에 존재한다. 그 갈등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의 태동에서 완성까지를 살펴보자.

중국 공산당이 처음에 만나는 문제는 이미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국민당과 어떻게 주도권 쟁탈전을 하는 가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의미있는 사건이 바로 국공합작이다. 북방에 있는 군벌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맺어진 1차 국공합작(1924.1~27.7)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형성된 2차 국공합작(1937.9~45.8)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생존 기반과 생존 여력을 키워줘 중국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줬다.

1차 국공합작은 1927년 장쩨스(蔣介石)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면서 와해됐다. 공산당이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자기 세력 불리기에 들어갔다고 판단해서 급히 이뤄진 이 조치를 통해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처형에는 성공했지만 이 사건을 난창봉기를 촉발시켜 결국 공산당의 세력화에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 셈이 됐다. 난창봉기는 결과적으로 위기에 몰린 공산당이 융합해 큰 힘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장쩨스의 상하이 쿠테타이후 이 조치에 불만을 품은 주더(朱德) 등은 3만명의 병사를 동요해 8월 1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의 주도그룹은 저우언라이(周恩來), 류보청(劉伯承), 허룽(賀龍), 예칭(葉挺), 장궈다오(張國燾) 등으로 이후 중국 공산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이들이다. 하지만 봉기는 국민당의 반격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주도세력은 광저우까지 밀렸다가 패퇴한다. 하지만 각 주도자들은 살아남아 계속해서 공산주의 맹아를 키운다. 비록 산이 많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기에 불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 여전히 낙후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난창은 중국 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되었고, 지금도 시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이 첫 회합을 가진 회의터
중국 공산당이 첫 회합을 가진 회의터
난창봉기로 인해 중국 공산당사에 가장 의미있는 마오쩌둥과 주더의 징강산 회사(回事)가 이뤄진다. 후난성에서 소비에트(각 지역 단위로 형성하는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공산화 운동)운동을 벌이다가 국민당에 밀려 천하의 요세 징강산(井岡山)에 둥지를 튼 마오쩌둥에게 난창봉기로 밀려난 주더가 찾아오면서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중국 공산당의 절대적인 힘을 제공한다. 그래서 징강산은 현대사의 양산박(梁山泊)으로 불린다. 마오쩌둥과 주더의 만남, 또 이어진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공산중국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마오에게 있어 주더는 군사의 부분에서 저우언라이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키워드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치지 않고, 장년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은 대장정이다. 주변이 천혜의 낭떠러지로 연결된 징강산이나 지앙시(江西) 소비에트를 위해 이동한 루이진(瑞金) 등도 계속해서 토벌을 위해 진격하는 국민당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29년 4월에는 홍군은 징강산을 포기했으며, 1934년 10월에는 루이진을 기반으로 공산당은 극비 하에 장정을 시작한다. 처음 장정을 이끌던 세력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에 큰 목소리를 반영하던 브라운 등 군사고문과 소련 유학파였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고, 홍군은 초반기에 결정적인 패배를 계속한다. 이 과정에서 어렵사리 구이저우(貴州)성 준이(遵義)에 도착한다. 이 회의에서 소련파나 브라운 등은 헤게모니를 마오쩌둥에게 넘긴다.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준의회의 이후 처음으로 자주 독립적인 중국식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하게 됐고, 유아기에 머물던 중국 공산당이 청년기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준의회의 이후 광시, 윈난으로 긴 길을 우회해 쓰촨으로 접어든다.

지아싱 난후에 있는 회의배. 상하이에서 옮겨 이곳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다
지아싱 난후에 있는 회의배. 상하이에서 옮겨 이곳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다 ⓒ 조창완
장궈다오를 망친 카인 콤플렉스

진사지앙(金沙江)과 대설산을 넘어 쓰촨성 마오궁(懋功)에 도착한 홍군의 주력은 장궈타오(張國燾)가 이끄는 제4방면군과 극적인 상봉의 기쁨을 젖어든다.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마오쩌둥과 장궈다오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마오궁에서 만날 때, 장궈다오는 허난(河南), 후베이(湖北), 안후이(安?) 등에서 태동한 제 4방면군을 쉬샹첸(徐向前)과 이끌고 있었다. 1방면군에 비해 국민당이나 군벌의 공격이 작아 숫적으로 휠씬 우위에 있었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준의 회의 등에서 부여받은 당권을 갖고 있었다.

결국 두 세력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작전의 분리로 이어졌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남방군은 항일전쟁과 안전을 위해 샨시(陝西)나 산시(山西)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은 그 길을 먼저 갔다. 쉬샨첸과 장궈다오는 창지앙 남쪽으로 다시 세력을 확대해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결국 그들은 갈라섰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약 3만명의 남방군은 티벳과 경계를 이루는 위험한 지역과 거대한 습지를 지나서 1935년 10월 20일 샨시성 북부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홍군 25, 26, 27사단과 합류했다. 이 지역이 바로 위치(吳旗)나 바오안(保安) 등의 근저였고, 후에 주력이 옌안(延安)으로 이동한다. 반면에 남방군이 떠난 쓰촨에 남아있던 4방면군의 훗날은 너무 참담했다.

이미 마오군의 추격로를 쫓기에 벅찼던 장쩨스 군은 이들의 군대를 대상으로 포위작전을 펼쳤고, 결국 이 둘 역시 북쪽으로의 이동을 위해 남방군이 떠난 1년후인 1936년 12월 북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들의 군대는 황허를 건너다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부대는 거의 전멸했고, 쉬샹첸과 장궈다오 등은 비참한 상태로 바오안에 도착했다. 쉬샹첸은 장궈다오에게 책임이 몰리면서 정치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었다.

홍군이 도하작전을 벌였던 윈난성 리지앙의 진사지앙. 당시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홍군이 도하작전을 벌였던 윈난성 리지앙의 진사지앙. 당시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 조창완

하지만 1937년 장궈다오는 공산당 중앙위에서 ‘견책’을 받았고, 38년에는 소비에트를 떠나, 한코우(漢口)에 가서 국민당에 투항했다. 그는 국민당에 들어가 장쩨스를 찬양하고 홍군을 비난하는 입장에 섰다. 49년 국민당이 패주했을 때, 그는 가족과도 헤어져 홍콩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장궈다오의 가족을 홍콩으로 보내 그와 함께 지내도록 조치해줬다.

장궈다오의 인생은 공산당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가, 결국 패장이 됐고, 배신자가 됐다고 한때의 적에게 은혜를 입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장궈다오를 망친 가장 원인은 이른 성공으로 인한 자만과 베이징 대학 학생 지도자를 지냈다는 엘리트 의식으로 인한 컴플렉스 때문이다.

그는 베이징 대학에서 학생 지도자를 지낼때 첸두슈(陳獨秀), 리따자오(李大釗) 등과 사귀었고, 도서관에서 일하던 마오쩌둥 등에게 공산주의를 전파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막상 거대한 자신의 부대를 뒤로하고 마오쩌둥의 아래에 서기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억지스런 방식으로 당권을 장악하려 애썼고, 그것이 자신의 파멸을 자초했다.

아버지를 잃은 장쉐량의 한이 국민당의 발목 잡다

하지만 공산 중국을 만든 마지막 갈등은 사실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가 아닌 국민당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그 중심사건에는 2001년 10월 하와이에서 101세의 나이로 죽은 장쉐량(張學良)이 서 있다. 홍군은 어렵사리 장정을 마치고, 험난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쉽사리 국민당군이 침입하기 어려운 샨베이(陝北)에 자리했다. 하지만 이미 전력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샨베이의 지형도 전적인 보호를 해줄 수 없었다. 그럴 때 공산당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장쉐량이었다. 아버지 장쭈어린(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暴死)된 것에 불만을 갖고 있던 장쉐량에게 공산당 토벌만을 생각하는 장쩨스의 조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왼쪽은 징강산 따징에 있는 남창봉기군의 이동경로 전시관. 오른쪽은 홍군열사들의 기념비
왼쪽은 징강산 따징에 있는 남창봉기군의 이동경로 전시관. 오른쪽은 홍군열사들의 기념비 ⓒ 조창완

결국 당시 국부군 동북군(東北軍) 책임자였던 장쉐량은 제17로군의 양후청(楊虎城)장군 등과 협력해 36년 12월 12일 산시성(陝西省) 시안에서 공산당 토벌을 지휘 중이던 장쩨스를 체포했다. 그는 장쩨스에게 압력을 가해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서도록 했다. 샨베이와 그리 멀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극구 말렸지만 이상스레 고집을 부리고 시안을 향했던 장쩨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얻는 대신 공산당과 타협해 2차 국공합작을 추진해야 했다.

이미 중국 전역에 파고든 일본군을 무찌르는 공동전선의 성격을 띠고 홍군은 팔로군으로 변신했다.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세력을 유지하는 한편 여전히 부패한 모습을 보인 국민당군에 염증을 내던 중국인들의 관심을 얻게 됐다. 공산당은 항일전을 통해 전열된 힘을 보여줬고, 일본이 항복한 후 서북향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5년 10월 1일 이들은 톈안먼의 누각에서 광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1921년 프랑스 조계지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가진지 스물여덟해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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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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