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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각 청소 한단다. 아곱씨까지 나온 나."

이른 아침, 청별 관광 슈퍼 성일이 오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이즈음부터 보길도는 문중들마다 시제준비로 분주합니다. 강씨, 김씨, 이씨, 박씨, 조씨, 전씨, 윤씨..... 마을별로 집성촌을 이룬 각각의 성씨들이 공동의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철이지요.

성일이 오춘의 전화를 받고 얼결에 "알았소잉" 대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망설입니다. 올해부터는 시제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보길도에 사는 강씨들 중에도 젊은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어쩐 일인지, 시제에는 누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제에 가면 노인들뿐이고 거기에 젊은 사람이라고는 오직 나 혼자였으니,
그 마음 불편함이 어떠했겠습니까.

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집을 나섭니다. 날도 추운데 나라도 가지 않으면 노인네들이 얼마나 큰 고생을 할까. 벌초를 하지 않으려다 하러 갔던 것과 같은 생각이었지요.

벌써 제각 마당은 노인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합니다. 한 해 동안 닫혀 있던 제각 문을 열고, 낡은 건물을 청소합니다. 제각 방안을 쓸고 닦고, 솥과 냄비와 제기들을 꺼내서 씻고, 제각 주변의 낙엽들을 걷어냅니다.

제각에는 나를 제외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각각의 집안에서처럼 여자 노인들만 분주합니다. 위패에 모셔진 진주 강씨의 후손들은 없고, 강씨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할머니들만이 청소를 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음식을 다 장만해 놓고 기다린 뒤에야 나타나서 제물을 올리고, 절하고, 먹고, 마시고, 떠들다 취해서 돌아들 가겠지요. 여자들은 또 뒤에 남아 설거지하고 청소까지 마쳐야만 집으로 돌아 갈 수 있겠지요. 그런 모습은 보길도 진주 강씨 시제에서만 목격되는 풍경은 아닐 것입니다.

노인들이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동안, 나는 음식 만들 땔감을 마련합니다. 장작불을 때서 음식을 장만해야하기 때문이지요.

"힘든데 그만해라"
"머 힘들다우. 조금만 더 하고 그만 할라우. 함마이들이나 쉬엄쉬엄 하씨요"

노인들은 청소가 끝나면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나와 이른 아침부터 생선을 굽고, 나물을 다듬고, 고기를 삶고, 탕을 끓이고, 전을 부치고, 종일 제사 음식 장만을 하겠지요.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자식들과 남편의 조상을 위해 그러하겠지요.

저 늙은 여인들이 시집 온 뒤로 일생 동안 단 한번이라도 자기 조상들의 시제에 참석 해본 적이 있었을까. 바쁜 일이 있다고 더러 먼저들 돌아가고, 몇 분의 노인만 끝까지 남아 그릇을 닦습니다.

남자들도 없는데 남자들 들으란 소린지, 제각에 모셔진 강씨 조상님들 들으란 소린지, 늙은 여인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는 이날 입때 꺼정 맨 날 종 노릇만 해."

제각 담장 밖 숲에서 땔감을 자르다 말고 나는 그만 먹먹해집니다. 저렇게 말은 해도 내년까지 살아 남을 수만 있다면 노인들은 평생을 그래왔던 것처럼 또 다시 이곳으로 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겠지요.

나는 아득하여 숲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톱을 쥔 채 저물도록 숲 속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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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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