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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대학에 강의하러 가서 어르신들께 인생의 사계절 중 어느 계절에 와 계신 것 같으시냐고 여쭤보면, 한두 분을 빼고는 "가을"이라고 답하신다. 겨울이라는 답을 예상했던 내가 그 이유을 궁금해하면, "열매 다 맺고 잎 떨구는 가을이지, 자리에 누워 세상 떠날 날만 기다리거나 죽어 땅에 묻히는 게 겨울이고" 하신다.

11월의 주말 아침, 수락산 등산로에는 알록달록한 등산복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낙엽이 깔린 길을 20분쯤 걸어 올라가니 아담한 건물 한 채가 산을 뒤로 하고 계곡을 내려다보며 동그마니 앉아 있다.

노인복지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노인복지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어르신 사랑 연구 모임(http://cafe.daum.net/gerontology)' 회원들과 단체로 서울시립노인요양원을 방문 견학하는 날이었다.

할아버지 스물세 분, 할머니 마흔일곱 분 해서 모두 일흔 분의 어르신들이 함께 모여 사시는데, 평균 연령은 82세이고 제일 연세가 많으신 분은 107세 할머니이시다. 이 곳은 주거 복지 시설인 양로원과는 달리 몸이 편찮으셔서 도저히 혼자서는 생활하실 수 없는 어르신들을 위한 의료 복지 시설이다.

대부분 두 가지 이상의 병을 지니고 계시고, 한 번 입소하면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리는데 전액 국비와 시비로 운영되는 무료 시설이다.

요양원에서 나가시는 경우는 보통 네 가지인데, 돌아가시거나 가족이 모실 만하게 되어서 가족에게로 가시는 경우, 아니면 건강이 호전되어서 더 이상 요양원에 계실 필요가 없는데 연고자가 없다면 양로원으로 옮기시게 된다. 그리고 치매나 뇌졸중으로 인해 다른 입소자의 생활에 피해를 끼치게 되면 그때는 전문요양원으로 가시게 된다.

유리창 밖으로 산과 나무들이 훤히 내다보이고, 깨끗한 환자복에, 절절 끓는 방바닥, 세 끼 따뜻한 식사, 어쩌면 그곳 어르신들은 생활 켜켜에 박혀 있는 복잡하고 자잘한 일상사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오히려 홀가분하고 편안해 보이시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수십년 모르고 살아오시던 분들이 한 방에 여섯 분씩 모여 사는 데 어찌 어려움이 없을까. 또 제 각각의 식성과 식습관이 굳어 있을텐데 정해진 식사 시간과 식단에 적응하는 데 왜 힘들지 않으시겠는가.

어르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식단을 짜긴 하지만 오늘 당장 떡국이 먹고 싶다고, 시원한 물김치가 먹고 싶다고 그 자리에서 드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의 식단에 들어가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 나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 단체 생활에 맞추는 일의 어려움이 어디 음식 한 가지뿐일까.

그래서일 것이다.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은 표현을 잘 하지 않으시고 부정적인 면이 강해서, "그건 해서 뭐해?" 하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하신다고 한다. 막상 하고 나면 기분 좋아지고, 오래 기억하며 즐거움을 되새기는 일이라 해도 처음의 반응은 부정으로 시작돼서 직원들이 무척 힘들고 그 어느 복지 기관보다 직원들의 소진이 빨리 온다고 한다.

어르신 70명에 직원 32명, 2대 1의 비율로 법적 정원에 맞는 숫자이긴 하지만 실제로 365일, 24시간 근무에 야간 수당, 시간외 근무 수당도 없어 직원들의 고충이 무척 크다고 한다.

요양원에서 내다 보이는 산기슭에는 '장수농장'이 조성돼 있는데 어르신들은 워낙 몸이 좋지 않으셔서 직접 농사를 못 지으시고, 인근 군부대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볏짚을 구하지 못해 옷만 입혀 만든 빼빼 허수아비 하나가 수확이 다 끝난 빈 밭고랑에 누워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건물 아래층 한 켠에 있는 장례식장. 시신을 안치하는 스테인레스 냉동고 세 칸과 고운 먼지 내려 앉은 텅빈 빈소가 눈에 들어온다. 생의 마지막을 의탁한 이 곳에서 임종을 하시면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라고 한다. 몇 년 동안 정붙여 살던 곳을 떠나 전문요양원같은 또 다른 생소한 곳에서 임종을 하시는 경우도 있으니까.

11월의 아름다운 산, 잎 떨군 나무들 사이에서 어르신들은 오늘 어떤 꿈들을 꾸실까. 고향, 어린 시절, 가족,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서 가게 될 그 어느 곳…. 그 곳에서 낙엽이 지듯 한 삶도 소리없이 지고 있었다.

우리들 생의 마지막은 어디에서 보내게 될까. 정직하게 그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요양원 어르신들이 젊은 시절 자신이 마지막 살 곳으로 이 곳을 염두에 두셨던 적이 있을까. 아무리 따뜻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해도, 내 집을 떠나 가족 곁을 떠나 낯모르는 이들과 함께 똑같은 환자복을 입고 마지막 나날을 지내게 될 것을 꿈꾼 적이 있었을까.

정말 나는 나의 마지막 시간들을 어디에서 누구와 보내게 될까. 요양원을 뒤에 두고 수락산 등산로를 되밟아 내려오는 길, 늙어감과 죽음이라는 우리들 삶의 너무도 분명한 길이 내 가슴 속에 또 한 번 새겨진다. 새파란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게 우리들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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