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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청을 잘라다가 가지런히 엮어 말리고 있다. 잘 마르면 시레기라고 부른다. 된장을 풀어 시레기국을 만들면 아주 그만이다.
무우청을 잘라다가 가지런히 엮어 말리고 있다. 잘 마르면 시레기라고 부른다. 된장을 풀어 시레기국을 만들면 아주 그만이다. ⓒ 전희식
가을 해는 너무 짧다. 오늘도 끝도 없이 쌓인 일거리 한번 바라보고 서쪽하늘 한번 쳐다보고 하면서 기울어가는 가을 해를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기운을 잃어가는 가을 햇살도 애잔한데 그나마 하루가 다르게 해가 짧아지니 마음은 더 없이 바빠진다.

요 며칠 빤하게 비추었던 햇살 덕에 콩이 잘 말라서 타작을 하였다. 옛날에야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찰흙을 산에서 퍼 와서 타작마당부터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요즘은 기계가 대부분 다하고 콩이나 깨 등은 포장이 잘 되어 있는 아스팔트 길가에 늘어놓고 타작을 한다.

나도 하루 너댓번 들어오는 우리 동네 버스종점에 콩을 갖다놓고 타작을 시작하였다. 단식 4일째라 기운이 없어 비실거리는 폼이 보기 딱했나 보다. 모정 집 아주머니하고 종점 할아버지가 도리깨를 뺏더니 신나게 두들겨주셨다. 나는 장단이라도 맞추고 푸짐한 입담이라도 선보여야 했지만 굳이 안 그래도 될 듯하여 옆에서 튀는 콩이나 쓸어모았다. 두 분 다 사진을 찍겠다니까 극구 얼굴을 감추신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새들이는 처음 해 보는 도리깨 타작에 신이 났다. 군소리 한마디 없이 일을 제법 잘 한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새들이는 처음 해 보는 도리깨 타작에 신이 났다. 군소리 한마디 없이 일을 제법 잘 한다. ⓒ 전희식
다시 밭으로 와서 들깨 두벌타작을 하려고 봤더니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인지 깻대가 아직 다 마르지 않고 꿉꿉하여 한 번씩 뒤집어 주면서 비실거리는 가을햇살을 혀를 끌끌 차면서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늘 그렇지만 밭에 와서 보면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거리가 여기저기서 불거진다. 지난번에 호박을 몇 구루마나 따왔건만 밭둑 덤부렁 속에는 커다란 누렁 호박이 몇 개나 숨어 있었다.

넝쿨을 헤치면서 호박을 끌어내고 있는데 저쪽 아랫길로 아들 새들이가 가방을 휘휘 내저으면서 오는 게 보였다. 2-3km 되는 학교 길을 걸어서 오는 중이었다. 나는 모른척하고 허리를 굽혀 계속 일을 하고 있는데 이 녀석이 나를 봤나보다.

내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는 살금살금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발자국 소리도 안 나게 도둑고양이처럼 도망가는 새들이가 길모퉁이를 막 돌아갈려는 찰나에 내가 능청스레 불렀다.

"새들아..."
"어? 아. 네... 아빠."
"내가 새들아...라고 부르면 너는 어떤 느낌이 드냐?"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요? 왜요?"
"이 촌놈. 아무 생각도 안 들긴. 아빠가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부르나 싫은 기분이 들것 같은데? 안 그러냐?"
"아...뇨."
"그럼 됐다. 집에 가서 대야하고 괭이 좀 가져오너라. 돼지감자를 좀 캐야겠다."

돼지감자가 한 포기에 한 대야가 넘을 정도로 엄청 맺혔다.
돼지감자가 한 포기에 한 대야가 넘을 정도로 엄청 맺혔다. ⓒ 전희식
그제야 새들이가 본색을 드러냈다. 걸어오느라고 다리가 아프다느니 자기도 오늘 하루가 피곤했다느니 불평을 털어놓다가 대야하고 괭이를 갖다만 주면 되냐고 확인을 받더니 밭두렁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가서 금세 가지고 왔다.

나는 새들이에게 사진 한판 찍어주겠다고 꼬드겨서 도리깨질을 해보라고 했다. 새들이는 금방 재미를 붙였는지 웃통까지 벗어놓고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도리깨질을 신이 나게 하였다. 깨가 밖으로 다 튀어 버리니 처음에는 살살 두드리고 나중에 가서 세게 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빠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 시험 한번 치고 나면 선생들이 도리깨 타작을 하곤 했다고 했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옛날에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매질을 엄청 했던 것을 도리깨타작에 빗대서 하는 말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외에도 옛날이야기 몇 토막으로 새들이를 밭에 확실하게 붙들어 매는 데 성공했다. 밤이 깜깜 해질 때까지 새들이는 나랑 밭에서 일을 했다.

덕분에 나는 들깨 타작은 새들이에게 맡기고 돼지감자를 캘 수 있었다. 돼지감자는 생식용으로 심은 것이다. 다른 작물보다 섬유질이 많고 수분이 많아 생식용으로 아주 제격이라고 해서 올해 처음 심은 것이다.

재작년에 옆 마을 친구가 야콘을 주어서 심었더니 생식용으로 아주 그만이어서 올해도 조금 했었는데 돼지감자까지 하고 보니 이번 단식이 끝나고 나면 생식을 지금의 하루 한 끼에서 두 끼로 늘릴까 싶어진다.

아예 깜깜 해져 버렸다. 가을해가 산 뒤로 꽁꽁 숨어버린 뒤에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들이가 사진을 찍겠다고 하여 자세를 잡았다.
아예 깜깜 해져 버렸다. 가을해가 산 뒤로 꽁꽁 숨어버린 뒤에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들이가 사진을 찍겠다고 하여 자세를 잡았다. ⓒ 전희식
특히 돼지감자는 밭에 둔 채 먹을 때만 캐다 먹어도 된다. 겨우 내내 얼어죽지를 않고 봄이 되면 그 상태에서 다시 자라나서 새로운 감자를 맺기 때문에 농사도 싶다. 내 개인 쇼핑몰이 완성이 되면 생식을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야콘과 돼지감자를 주문하는 양만큼씩 밭에서 캐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나저나 올해는 비가 적었고 또 꽃이 필시기에 태풍이 불어서 콩도 영 부실하고 들깨도 시원치가 않다. 정농회 회원들도 보니 잡곡은 다들 흉년이라고 한다. 막상 일을 할 때는 흥도 나고 재미있는데 이게 몇 푼이나 될까 셈을 하다보면 한숨이 난다.
첨부파일
nongju_61184_35[1].AVI

덧붙이는 글 | 도리깨는 우리 마을에도 없는것을 얼마전 경상도 내 고향에 갔다가 시장에서 사 온것이다. 앞으로 방 안에 걸어 둘 수 있는 장식용 도리깨를 뒷산 대밭에가서 대를 잘라다가 만들어 볼 생각이다.

이 장식용 도리깨도 잘 만들어지면 쇼핑몰이 완성되었을 때 손님들에게 기념으로 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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