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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약을 사온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뿌릴까 말까 고민 하다가 시간만 흘려 보냈습니다. 그 사이 풀들은 자랄 대로 자라 봄에 사다 심은 나무들을 다 덮어버렸습니다. 더러 풀을 매주긴 했으나 매고 돌아서면 불쑥 솟아나는 풀들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지요.

다른 풀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깔깔이라는 덩굴이 문제였습니다. 놈들은 주변의 모든 풀들을 무자비하게 고사시키더니 끝내 새로 심은 나무들의 숨통마저 조여버렸습니다. 깔깔이를 걷어내주자 그 동안 자라지 못하고 웅크려 있던 나무들이 비로소 숨을 내쉽니다.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생전 처음 농약을 탑니다. 물 한 말 당 농약 20ml. 농약 뿌리는 분무기가 없어서 물 조리개에 농약을 탑니다. 농약병 뚜껑을 열자 역한 냄새가 올라옵니다. 검푸른 빛의 물약.

농약병을 잡은 손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농약이 물 속으로 침투하자 놀란 물이 사색이 됩니다. 죽음의 색이란 바로 저런 색을 두고 일컫는 것이겠지요.

저것은 마치 논둑 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푸독사의 이빨에서 뚝뚝 떨어지던 그 징그럽고 무서운 독과 같습니다.

농약 맞은 풀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죽어갈 것인지에 대한 연민은 없습니다. 농약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호미로 매거나 낫으로 베서 제거할 작정이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당의 풀도 뽑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산다지만, 실상 모든 풀들이나 나무나 벌레들과 함께 살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살아보니 사람이 풀들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 해서 풀들도 사람의 경계를 지켜주지는 않습니다. 벌레나 나무도 마찬가집니다.

풀이 무성하여 안마당까지 들어오면 모기, 쐐기, 들쥐, 개구리를 비롯한 온갖 벌레며 곤충, 동물들이 따라들어오고 심지어 독사나 살무사까지도 제 집처럼 기어다닙니다. 먹이를 따라 이동해오는 것이겠지요.

대나무만 해도 그렇습니다. 담장 밖에 있던 녀석들이 슬그머니 담을 넘는가 싶더니 어느새 집 모퉁이까지 뻗어 와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곧 구들까지 파고들 것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동안 풀이나 벌레나, 들쥐나, 뱀이나, 대나무에게 서로의 영역은 침범하지 말자고 자주 당부했습니다. 내가 사는 집이 아니라도 이 섬에는 그들이 살 만한 숲과 들이 널려 있으니 그리로 가서 살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들이 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는 않더군요.

더구나 나무들을 뒤덮은 깔깔이처럼 다른 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자신만 무한대로 번식하는 나쁜 풀에게는 말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깔깔이를 사정없이 걷어내고, 뿌리가 박히고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 농약을 칩니다.

그라목손, 이곳 사람들이 흔히 불 약이라 부르는 제초제. 불에 탄 것처럼 식물들을 태워 죽여버린다 해서 불 약이라 하는 걸까요. 병 겉면에는 비 선택성 제초제, 식물전멸 제초제라 씌어 있습니다.

농약이 뿌려지자 그 독한 냄새로 인해 숨쉬기조차 어렵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었는데도 그렇습니다.

문득 이곳의 노인들이 마스크도 없이 태연스럽게 농약을 뿌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무심히 봤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농약이라고는 처음 뿌려 보면서 별 엄살을 다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 치명적인 약을 뿌리면서도 아무런 저항감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테지요.

많은 농민들이 그렇게 농약에 면역이 돼서 무심히 농약을 뿌리다 중독돼 병을 얻기도 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실려 가기도 하지 않던가요.

나는 반병 정도의 농약을 뿌리고는 더 이상 뿌릴 수가 없습니다. 기분이 나쁘고 왠지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농약 병의 글귀가 숨을 막히게 합니다.

'이 농약은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매우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으므로 잘못하여 마셨을 때에는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으십시오.'

농약이 풀들만이 아니라 사람 또한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모든 식물을 전멸시키는 제초제인 그라목손이야 과수농장이나 씨앗을 뿌리기 한참 전 잡풀들을 죽이기 위해 뿌리는 농약이므로 직접 농작물에 뿌려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데 그라목손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지요. 다른 많은 종류의 농약들이 무시로 뿌려지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들이 풀이나 벌레를 죽이는 독약이라는 사실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농약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쌀과 밀과 콩과 참깨와, 배추와 무, 마늘밭에 때없이 뿌려집니다. 사과와 배, 밀감과 유자를 비롯한 과일들 위에도 뿌려집니다.

부족한 일 손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농약을 뿌리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이야 농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보다 짙은 농약 냄새를 직접 맡아보고, 소름끼치는 농약의 빛깔을 보고, 농약을 뿌려보니 농약 뒤집어쓴 곡식과 채소, 과일들을 먹기가 무서워집니다.

내가 텃밭의 배추와 무, 상치와 치커리, 마늘과 시금치, 당근, 토마토들에게 살충제나 제초제를 뿌리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힘들지만 호미로 풀을 매주고 손으로 벌레를 잡아준 것은 또 얼마나 잘한 일인지요.

그래도 내 먹거리는 직접 가꿀 수 있으니 농약 범벅이 된 농작물을 사먹어야 하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독이든 먹거리를 먹어야 하는 시대가 정직한 시대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키우는 먹거리에 생명을 죽이는 농약이 뿌려진다는 사실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역설입니까.

농작물이 자본의 순환고리에 걸려 상품이 되고, 이윤을 남겨야 하는 시대가 계속되는 한 그러한 역설은 계속되겠지요.

이제 나는 제 아무리 풀들이 극성을 떨고, 새로 심은 과일나무들을 뒤덮어도, 벌레들이 배추와 콩들을 뜯어먹어도 다시 약을 뿌리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농부들이 농약이라는 독극물을 머리맡에 두지 않아도 편안히 잠들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요. 농작물이 '상품'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되찾을 날은 대체 언제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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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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