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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에서 인권상을 받은 이회창 부친 이홍규옹.
법조프락치사건에 대해서는 지난호에서 언급한 이외에도 좀더 따져볼 것들이 있다. 1950년 전반기에 있었던 이홍규 검사 구속사건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서울지검 차장검사였던 김영재가 남로당에 가입했던 이유는 시선을 끈다. 그가 오제도 검사에게 진술한 바에 따르면, "친구인 강중인, 백석황 변호사 등이 여러 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남로당 가입을 유인하고 설득했다"고 한다.

특히 일제시대에 검사를 했던 김 검사는 "친일파 처단의 소리가 높아 당황했을 때 강, 백 변호사 등이 공산당에 가입하면 괜찮다고 여러 차례 꼬여대는 한편 궁박한 생계를 도와주면서 경제적으로 매수"하는 바람에 넘어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해방정국 초기 당시 적지 않은 검사들이 좌익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분위기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특히 "친일파 처단의 소리가 높아 당황했을 때 공산당에 가입하면 괜찮다고 꼬드겼다"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실제로 일제시대에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를 쓴 것은 물론이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방 후에는 누구보다 빨리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지 않았던가.

이홍규 검사도 일제시대에 오랫동안 조선총독부 검찰국 서기 겸 통역생의 신분으로 일하면서 일제에 부역했던 전력이 있다. 그가 사상적으로 오해를 받을 것이 분명한 데도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준 혐의로 구속된 것도 당시의 이런 주변 상황과 무관치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영재 검사는 구속된 뒤 오제도 검사에게 다른 좌익 혐의자를 밀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그가 검찰에 제출한 '회오(悔悟)의 상신서(上申書)'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영어(囹圄) 생활 몇 개월만에 평소에 이런 사람들이 혹 좌익이 아닌가 추측되는 것을, 친구라는 것을 떠나 수사에 협력하는 의미로" 제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서울지검에서 근무하고 있던 K, U 등 수 명의 검사를 법조계에 침투한 남로당 세포 책임자로 지목했다.

그렇다면 당시 김영재 검사에 의해 남로당 세포로 지목 당한 검사들의 '좌익혐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검사 취직 후 인민당사건 관계자 전부를 검사장과 상의 없이 석방하였다는 점."

"비록 최(최대교-필자 주) 검사장의 결재는 있었으나 교육자협회사건 피의자를 기소유예로 하였다는 점."

"8·15사건 관계자를 취급하였는데 T 검사가 취급한 것은 대부분이 기소된 반면에 K 검사가 취급한 것은 대부분 불기소되었다는 것."


앞의 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이런 내용들은 1950년 3월 이홍규 검사에게 적용된 '좌익혐의'와 비슷한 것이다. 아울러 법조프락치사건의 성격도 충분히 짐작된다. 실제로 김영재 검사는 "좌익에 동정적 태도로 나가는 검사들이 아닌가 추측되오니 일차 조사하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언급한 뒤 "하루바삐 만약 검사국 내에 세포가 있다면 속히 폭로"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반 매카시 선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동료배우를 공산당원으로 지목해서 고발하던 미국의 할리우드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우울한 풍경들은 조덕송(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의 회고록 <머나먼 여로> 3권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홍규-이회창씨 부자의 주장대로 이홍규 검사가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려 고통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동료검사를 좌익 혐의자로 밀고했던 당시의 이러한 검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당시는 좌익사건과 관련해서는 설사 개인적 소신과 결단에 의해 엄정하게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해서 언제든지 사상적으로 꼬투리를 잡힐 수밖에 없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동시에 동료검사를 끌어다가 고문까지 가했던 살벌한 상황에서도 '연고주의' 혹은 '패거리주의'(당시 서민들은 '빽'이라고 표현)의 위력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홍규 검사는 좌익혐의 사건으로 구속되고도 법조프락치사건에 연루된 다른 대다수 법조인들과 달리 얼마 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물론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것이 당대 최고의 권력 실세 중 한 명이었던 장면 총리와의 각별한 인연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앞의 기사에서 확인했듯이, 두 사람은 이후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매개로 정치적 동지 관계를 형성했다.

이와 비슷한 사연은 또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 천황의 신민(臣民)에서 해방 이후 좌익 혁명가로 전향해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활동하다 여순사건 직후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사형 구형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반공 성향이 강한 관동군과 일본육사 선배인 백선엽 장군 등의 배려와 선처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일제시대 당시 조선총독부나 일본군에서 부역했던 인물들이 해방 직후 어떻게 180도 방향을 전환해 좌파 지도부가 되거나 좌파사건에 연루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일제가 식민통치 기간에 가장 경계하고 극렬하게 탄압했던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던가. 물론 많은 사람들은 '대세추종주의'로 이를 설명하곤 한다. 실제로 해방 직후 미군정이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비율이 7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그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기보다는 대세론에 무임승차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좀더 세밀한 연구가 수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연고주의'가 '사상논쟁'보다 더 셌던(?) 셈이다. 국가안보는 표면적인 명분일 뿐 사상논쟁이 실제로는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비열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 생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1950년 서울지검에서 이홍규와 동료검사로 일했던 오제도와 선우종원.
이홍규 검사와 오제도 검사의 운명이 10년 후에 정반대로 뒤바뀐 것도 바로 이 '연고주의'와 직결돼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홍규 검사는 피난지 부산에서 검사로 복귀한 뒤 서울고검 검사, 광주지검장, 대검 검사를 잇따라 지냈다. 그런데 마침내 그에게도 행정부 보직에 진출할 기회가 왔다. 4·19혁명 후 그의 정치적 후원자인 장면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면서 법무부 형정국장(현 교정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에 임명된 것이다.

반면 자유당 치하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큰 권세를 누렸던 오제도 검사는 4·19혁명으로 상반된 운명을 맞아야 했다. 조봉암씨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진보당사건이 문제가 되면서 '반혁명 분자'로 낙인 찍혀 국회에서 파면 동의안까지 상정되는 등 인생 최대의 치욕을 맛본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검찰을 떠나야 했다.

이와 관련,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법조계의 한 원로인사는 "4·19혁명 당시 오제도 검사가 추락하게 된 데에는 과거 그에게 당했던 이홍규 검사의 개인적 원한(?)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당시 법조계에 파다하게 떠돌았다"고 말했다.

한편 오제도 검사는 영락교회와 깊은 연고를 맺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생전에 이 교회의 집사로 활동했으며, 2001년 그가 타계했을 때 영결식과 1주년 추도식도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락교회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공산정권에 의해 부와 땅을 빼앗기고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교회로써 강력한 반공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1997년 "이홍규 검사가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그가 충북지사(한경직 목사의 선배인 윤○○ 목사)를 전격 구속한 후 영락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왔다"고 말했던 것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당시 그는 '이홍규 검사 좌익설'의 진원지는 영락교회 교인들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선우종원 검사의 증언이 줄타기 곡예를 하듯 상황에 따라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홍규를 구속한 검사의 이름을 모른다"(1997년 <월간조선> 인터뷰)고 답변했다가 1년만에 "이홍규를 구속한 것은 오제도였다"(1998년 회고록 <격랑 80년>)라고 전혀 다른 주장을 했다. 최근에도 그는 "오제도 검사가 이홍규를 구속했다"(2002년 <뉴스메이커> 인터뷰)고 말했다.

특히 그는 2002년 6월 27일자 <뉴스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950년 당시 이홍규 검사가 법학자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그래도 (오제도 검사가) 내 말을 안 들었다"고 주장했다. 오제도 검사가 이홍규 검사를 구속하면서 무리수를 두었다고 은근히 꼬집은 것이다.

망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2001년 7월 1일 타계한 오제도 검사가 이에 대해 어떤 반격도 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오 검사는 이미 이를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1990년 당시 다음과 같은 '알 듯 모를 듯한' 주장을 남겨 놓은 바 있다. 당시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1949년 역시 반공검사였던 S씨가 찾아와 '이홍규 검사가 내 비행(非行)을 캔다며 고향친구 송모씨를 인천서에서 구속조사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 억울하니 혹시 상사들의 오해가 없도록 오 검사가 말을 잘해 달라'는 얘기를 했다."

여기서 "반공검사 S씨"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다만 이번에는 오제도 검사가 그 "반공검사 S씨"의 실명을 밝히지 않고 이니셜만 공개했다는 점이 시선을 끈다.

이것은 이홍규 검사 좌익혐의 구속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주인공이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난 것을 의미하거니와, 당시 이 사건이 오제도-이홍규-S검사 등 세 사람의 복잡한 삼각관계와 권력암투 속에서 전개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오제도, 이홍규, 선우종원 검사의 사연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 사이에는 끝임 없이 갈등과 연대의 관계가 교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남들에게 차마 털어놓기 어려운 어떤 사연들을 나누어 가진 듯하다. 다만 그것들이 각자에게 떳떳한 것이라면 조금도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회창 후보에게 고언을 드리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 16대 대선에서 이 후보가 절대 악용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사상논쟁 혹은 색깔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회고록 <아름다운 원칙>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구속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고통스런 고백을 한 바 있다.

"우리 집은 갑자기 슬픔에 잠겼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보다 크고 강하고 사악한 어떤 존재가 바깥 세상에 공존한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죄인으로 감옥에 가게 되면 그 가족은 모두 다 죄인이 된다. 이처럼 간단한 사실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아버지는 많은 고생을 하셨다. 구타, 물고문부터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고문을 직접 겪었다. 아버지를 뵙고 있으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물만 흘리곤 했다.

…면회가 끝나면 나는 다시 영천에서 전차를 탔다. 서대문을 지나 광화문에 이르면 전차에서 내려서는 걸어서 학교로 갔다. 학교가 가까워질 때까지도 볼이 마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몸은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그 무렵엔 세상이 그렇게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그뿐인가. 이회창 후보는 1997년 아버지의 좌익혐의가 논란이 되자 아버지 구속은 "모략을 당한 것"이라면서 매우 억울하다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이 후보는 1950년 전후 법조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됐던 다른 법조인들 역시 당시에는 그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며 억울함을 토로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회창 후보는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구속과 관련해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까지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현직 검사가 검찰에 연행되는 사건은 유례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그런 일은 전무(前無)한 것도, 후무(後無)한 것도 아니다. 이른바 사상(思想) 문제로 검사가 구속된 정도의 사례는 사실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끔찍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법조인이 희생을 당했다. 지면관계상 두 가지 사례만 들기로 하자.

사례1
"1948년 광주지검 순천지청의 박찬길 검사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직후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평소 엄격한 법의 기준에 따라 사건을 처리해서 올곧은 검사로 이름이 나 있던 그의 죄목은 반란군에 협조하여 인민재판에서 재판장을 담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혐의는 나중에 국회 조사과정에서 근거 없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박 검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된 까닭은 사실 그에게 평소 원한을 가지고 있던 현지 일부 경찰(주로 친일 전력을 가진 반공 성향)이 올린 날조된 정보 때문이었다. 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홍규 검사가 바로 순천지청에서 근무한 바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례2
"1947년 9월 초에 있었던 일이다. 부산지검 정수복 검사는 백주(白晝)에 검찰청사 앞 골목에서 서북청년단의 권총 테러를 받고 살해됐다. 한민당 경남도지부 간부 곽경종이 서북청년단원들에게 '공산당 사건이 그의 손에 넘어가면 모조리 풀려 나온다. 그가 있는 한 좌익타도는 어렵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말대로 정 검사가 분명 좌익 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되 그의 제거가 적어도 좌익 측에 심리적인 위축감만은 줄 것이 분명'(<중앙일보> 1973년 2월 5일자 문봉제 전 서북청년단장의 증언)하다는 이유만으로 정 검사는 테러의 희생양이 됐다."


이회창 후보가 1950년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좌익 혐의자로 낙인찍혔던 아버지의 신원(伸寃)만이 아닌 당시 아버지와 함께 '매카시 선풍'에 희생당한 모든 법조인들의 신원을 위해 힘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럴 때 아버지의 좌익혐의 의혹도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환상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이회창 후보가 이끌고 있는 한나라당의 김용갑 의원이 지난 10월 11일 국회에서 또다시 아무런 증거도 대지 않은 채 상대당의 대선후보를 "조선노동당의 2중대 1소대"로 매도한 것이다. 이 후보는 노무현 후보의 장인 좌익 전력과 관련해 일부 수구언론이 원색적인 사상공세를 벌일 때도 말리기는커녕 방관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이회창 후보와 김용갑 의원은 정작 자신들의 장남과 차남을 모두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법으로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적반하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이 이번 16대 대선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유독 자제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 제기하려는 사상논쟁의 위선을 똑똑하게 인식하고 반드시 근절시켜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이회창 후보는 1997년 "선친을 구속시킨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변했다.

"그야말로 날조됐죠.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검찰에서 기소했다가 나중에 공소취소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부산서 피난살이 할 때 부산지검 검사로 복직됐어요. 이제 와서 당시 사건을 지적하는 것은 넌센스예요."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그렇게 정색하며 반응했던 이회창 후보가 정작 1961년 당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사법살인'한 박정희 쿠데타 정권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던 재판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당시 이회창 후보가 5인의 재판관 중 1인으로 참여한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는 "조용수가 조총련계 자금줄인 이영근의 지령과 지원을 받아 북한이 지향하는 목적 수행을 위해 적극 활약했다"고 판결하고 '사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날조된,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우선 검찰은 조용수 사장이 <민족일보> 설립자금을 이영근으로부터 제공받았다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시 못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이영근에게 자금을 받아 조용수에게 전달했다고 검찰이 밝힌 조소수라는 인물을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기는커녕 며칠만에 석방해 일본으로 출국시키고 말았다.

결정적 '증거'와 '증인'이 배제된 상황에서 재판은 형식적으로 진행됐고, 결국 경남 함안 조씨 가문의 희망이었고 실제로는 우익 성향이었던 조용수 사장은 자신의 남로당 전력에 대한 미국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한 박정희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1961년 12월 21일 오후 4시 6분 교수형을 당해야 했다.

조용수가 사형을 당한 장소는 서대문형무소. '소년 이회창'으로 하여금 "온갖 수모를 당하고 눈물이 마르지 않게 했던" 바로 그곳이다. '소년 이회창'이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면회하던 날로부터 꼭 11년만의 일이었으니, 세상 천지에 실로 이런 "넌센스"가 또 있을까.

물론 이 후보 옹호론자들은 당시 이회창 후보가 나이 어린 초임 판사(당시 25세)였고, 명령을 거부하면 군인들에게 뺨을 얻어맞거나 '조인트를 까이는' 살벌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잘못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에도 법관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군인들의 부당한 차출 명령을 거부하고 불이익을 감수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그 판결이 있기 몇 년 전 유병진 판사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 류근일(현 <조선일보> 주필>)이 '모색-무산대중체로의 지향'이라는 사회주의를 조장하는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법정에 서자 "학교로 돌아가 학업에 열중하라"고 타이른 뒤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그 '양심적 판결' 때문에 유 판사는 우익단체 사람들로부터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고, 결국 법정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자 이제 글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됐다. 할 말은 많지만, 이홍규씨의 행적과 관련해 몇 가지만 더 언급하고 끝내기로 한다.

이회창 후보의 아버지 이홍규씨의 인생역정을 살피다 보면, 이 사건 이외에도 불투명한 행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문제는 그것이 모두 본인과 가족들이 투명하고 솔직하게 증언하지 않음으로써 의혹을 자초한 것들이라는 데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보자.

첫째, 이홍규씨가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지검에서 근무한 것인지, 순천지청에 근무한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우선 미군정청 임명사령 제64호에 따르면, 그는 1945년 12월 20일자로 순천지청 검사에 임명됐다. 이회창 후보의 회고록에도 아버지의 초임지는 전남지역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홍규씨의 자필이력서에 근거해 작성된 <한국법조인대관> 인명록에는 1945년에 서울지검 검사를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후자가 진실이라면 이씨가 일제시대부터 검사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권철현 대변인은 "이 총재의 부친은 일제 치하에서 동포들로부터 존경받는 검사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후보 옹호론자들은 "검찰 서기가 어떻게 독립지사를 수사했겠느냐"고 주장해 왔다.

둘째, 이홍규씨가 1943년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것인지, 아닌지가 분명치 않다.

그해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는 기록(<한국법조인대관>, <동아일보> 인물정보)도 있고, 판검사임용전형시험에 합격했다는 기록(<조선일보> 인물정보)도 있다. 그런데 최근 한 역사학자가 <조선총독부관보>를 찾아서 1943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최종, 예비, 구술 포함)을 일일이 확인했으나 '이홍규'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 못되건만, 굳이 합격했다고 주장해 경력에 허위로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셋째, 이홍규씨가 마루야마 아키오(丸山晃生)로 창씨개명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다.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에 보면 1930년부터 1940년까지만 '이홍규'라는 이름이 등장한다(1940년 마지막 기록-광주지법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 봉급 70원). 그러나 1941년에는 이홍규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리고 1942년부터 '마루야마'(광주지법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 봉급 70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홍규씨측은 그 마루야마가 본인인지 아닌지 답변을 회피해 왔다.

마루야마 아키오로 창씨개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홍규씨는 창씨는 물론 개명까지도 일본식으로 했던 유별난 조선인이 된다. 조선인 중에 열에 아홉은 강압에 못 이겨 창씨는 했지만 개명까지 한 경우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것들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이냐에 따라 이홍규라는 인물이 과연 일제시대에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일제에 부역한 '생계형 친일파'인지, 아니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독립지사를 고문하고 수사했던 '출세형 친일파'인지 밝혀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혹시라도 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야 아버지의 '적극적 친일행위'가 드러난다면 대한민국의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낭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후보는 모든 것을 거짓없이 말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 후보가 역사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중대한 일이 될 것이다. 떳떳하다면 못 밝힐 것도 없지 않은가.

한국현대사는 지금 한 대선 후보 아버지의 죽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캐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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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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