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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기사에서 약속한 것처럼, 이홍규-이회창 부자와 선우종원씨의 엇갈리는 증언을 비교검증해 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선입관을 버리고 사실관계를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필자주>

1. 이홍규가 석방된 시점은 언제인가?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회고록 <아름다운 원칙>에서 아버지가 연행되어 구속된 날짜와 석방된 날짜를 분명하게 밝혔는데, 구속과 석방 시점을 모두 '6·25 전쟁 발발 직전'으로 주장했다. 그는 "1950년 3월 26일, 6·25 전쟁이 터지기 석 달 전"에 아버지가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행되어 "구속된 후 두 달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고 증언한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이어서 아버지에 대한 검찰의 공소취소와 복직 과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부산 (피난) 생활이 몇 개월 이어지던 중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에 대한 공소가 취소되었다. 검찰 쪽에서 스스로 공소 사항들이 사실 무근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요즘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 사정에서 공소 취소는 무척 예외적인 일이었다. 검찰의 위신과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복권되셨고, 뒤늦게야 부산에 도착해 우리 가족과 상봉한 아버지는 곧이어 검사로 복직하셨다."

그런데 이 증언은 앞의 기사에서 소개한 1997년 4월경 이한동 신한국당 고문의 사상검증 공세에 대한 이회창 후보측(당시는 신한국당 대표)의 해명 내용과 다른 것이어서 주목된다. 당시 이 후보측은 "(이홍규씨가) 검찰의 공소취소로 석방돼 복직됐다"(<조선일보> 1997년 4월 29일자 재인용)고 밝힌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회고록에서는 "아버지가 석방되고 몇 달 후 검찰의 공소취소가 이뤄졌다"고 증언해 놓고(선 석방 후 공소취소),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둔 당시에는 "검찰의 공소취소 이후에 아버지의 석방이 이뤄졌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선 공소취소 후 석방).

물론 그것은 이 후보가 착오를 일으켰거나 언론이 잘못 보도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최근 이홍규씨의 석방 시점과 관련 새로운 주장이 나오면서 '6·25 발발 직전 석방'이 정설(定說)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2002년 2월 송석찬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홍규 검사 남로당 관련 구속사건'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이다.

"이홍규는 남로당 프락치로 좌익 활동을 하던 중 1950년 법조프락치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공산당이 내려오면서 석방됐다."(<뉴스메이커> 2002년 6월 27일자 재인용)

송석찬 의원의 '6·25 발발 직후 석방'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언론 보도도 있다. <월간조선> 1997년 2월호에 게재된 '철저검증-대쪽·소신의 대명사 이회창'이라는 기사가 바로 그것인데, 여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홍규 검사가 재판을 받던 도중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통에 재판은 진전될 수 없었다. 오제도 변호사는 '6·25 전쟁 발발 후 좌익사건 기록이 거의 없어져 재판이 진행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기록은 찾아내기 힘들었다."

송석찬 의원의 주장과 <월간조선> 보도가 만약 사실이라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이회창 후보가 주장해온 '6·25 발발 직전 석방설'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홍규씨가 언제 석방됐느냐는 사실은 매우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석방 시점에 대한 보다 분명한 확인 작업이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송석찬 의원이 거론한 '법조프락치사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이홍규는 부도덕한 권력층에 맞선 강직한 검사였나?

▲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에서 인권상을 받은 이회창 부친 이홍규옹. 작은 사진은 일제치하 검찰 서기 시절의 이홍규.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청백하고 고지식한 공무원이었다"면서 "당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은 반드시 끝까지 밀고 나갔고, 그래서 주위로부터 못마땅한 시선을 받은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증언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고문까지 받는 등 수난을 겪은 것도 바로 그런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이홍규씨도 1994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상부의 미움을 받았다는데 어떤 일들이었나"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변한 적이 있다.

"해방 후 광주지검에 근무할 때 땅부자인 모 정당 전남도지부장의 세무비리 뇌물공여 사실을 적발, 그 정당과 윗사람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구속기소한 일이 있었지요. 또 그 직후 청주지검으로 좌천돼 이승만 대통령의 친구였던 충북도지사의 독직사실을 밝혀내 역시 구속했습니다."

결국 이홍규씨가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직한 검사'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1)광주지검 검사 재직시 모 정당 전남도지부장의 세무비리 뇌물공여를 적발해 구속시켰다는 것과 (2)청주지검 검사 재직시 충북도지사의 독직사건을 적발해 구속시켰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홍규-이회창씨 부자측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재판기록이나 보도기사 등 '객관적 증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취재진이 당시 발간된 신문을 뒤진 끝에 그것을 찾아냈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23일자에 실린 보도기사가 바로 그것인데, 당시 표기법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검사국에서는 11월 29일 광주세무서장 권중형 이하 10명의 세무관리, 부호, 실업가 등을 일제 검거하여 이홍규(李洪圭) 검사 담당으로 엄중 취조 중이던 바 10일 관계자 전부를 기소, 공판에 회부하였다 하는데 사건의 내용을 보면 전기 권 세무서장은 그 부하인 직세과장 김왕성, 간세과장 양기성 들과 같이 부호 고광표, 손종채, 지창선, 국승관(요리업) 김기호, 최금봉(주조업) 라종현, 임희택 등으로부터 총액 16만원의 뇌물을 받고 그들의 세금을 감하여 준 것이라 한다."

원래 이홍규씨의 한자 이름 표기는 '李弘圭'이긴 하지만 당시 기사에 나오는 '李洪圭'는 기자의 오기(誤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창 후보의 회고록 등을 비롯해 당시 이홍규씨가 광주지검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홍규씨는 조선총독부를 대체한 미군정청 장관인 아놀드 미 육군 소장이 발동한 '임명사령 제64호'(APPOINTMENT NUMBER 64)에 의해 1946년 1월 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검사로 임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홍규씨가 앞의 인터뷰에서 거론한 "모 정당"은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와 조병옥(미군정청 경찰국 조선인 국장) 등이 리더로 활약하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월간조선> 1990년 10월호에는 "(이홍규씨가) 초임 검사 시절 당시 위세가 당당한 한민당의 전남지부장을 권력층의 압력과 김병로 당시 사법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했다"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홍규씨가 실제로 위의 기사에서 소개한 세무비리 뇌물사건으로 권력층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인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즉 고광표, 김기호, 라종현씨 등 8명의 뇌물공여자 중 이홍규씨가 언급한 "모 정당의 전남도지부장"이 포함돼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취재진이 가지고 있는 현대사 지식의 범위에선 현재까지 명확하게 확인이 안 된 상태임을 밝혀둔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홍규씨의 주장은 진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거니와,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함 속에서도 검사의 길을 올곧게 걸은 '강직한 검사'로서 널리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씨는 일반적인 세무비리 적발사건을 나중에 정치적으로 미화해 합리화한 셈이 된다.

이와 관련,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이 <동아일보>라는 사실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민당의 기관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던 '극우지'로써, 철저하게 친한민당의 당파성을 보였던 신문이다. 한민당을 조금이라도 공격하면 '빨갱이'로 몰아버리던 <동아일보>가 과연 한민당 지부장을 구속시킨 이 사건을 이렇게까지 감정의 동요 없이 보도할 수 있었을지 솔직히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 전후의 <동아일보> 성향에 대해서는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린 필자의 졸고 '대통령 선거와 언론-개가 주인을 무는 풍경'을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 <동아일보>가 '극우지'였다는 것은 1946년 미군정이 직접 조사해 분류한 결과임을 밝혀둔다. 참고로 당시 <조선일보>는 '중립지'로 분류된 바 있다. <조선일보>가 오늘날처럼 '극우지'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 등장 이후부터다. <조선일보>의 1933∼40년까지의 노골적인 친일·반민족 보도 성향과 별도로 박헌영 기자 등이 활동하던 1920년대의 반일 보도와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중립적 보도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충북도지사 독직사건과 관련된 보도기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건의 내막과 관련해서는 오제도 검사가 <월간조선> 1997년 2월호에서 이홍규씨의 주장과는 다소 다른 '반론'을 펼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구속된 충북지사는 신의주 출신의 윤○○ 목사였다. 그는 영락교회 원로 목사인 한경직 목사보다 선배다. 충북지사로 있던 윤 목사가 미국의 구호물자를 팔아서 유용한 것은 사실이나 행정비에 보태 쓴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가 됐던 것은 도지사를 구속하려면 검사장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이홍규 검사는 검사장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새, 전격 구속해 버렸다."

▲ '반공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씨
이러한 오제도 검사의 반론과 일부 의혹이 있긴 하지만, 취재진은 이홍규씨가 일정 정도 '강직한 검사'의 성향을 보였던 것만은 사실로 보고 싶다.

다만 1946년의 뇌물사건 및 1948년의 독직사건과 1950년에 발생한 '이홍규 검사 좌익혐의 구속사건'을 곧바로 연결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확인작업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지역토호를 구속시킨 이 사건들 때문에 자신이 이승만 대통령과 한민당의 미움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청주지검에서 서울지검으로 '영전'되어 갈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사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당시 권력층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을 지킨 판사나 검사는 이홍규씨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이홍규씨처럼 남로당 혐의자를 풀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낮에 검찰청사 앞에서 서북청년단의 '권총 테러'를 받고 목숨을 잃거나 경찰의 모함을 받고 총살형을 당한 검사들까지 있었던 것이 당시의 살벌한 상황이었다.

3. 이홍규 가문은 대대로 가톨릭 집안이었나?

▲ 1950년 서울지검에서 이홍규와 동료검사로 일했던 선우종원씨.
우리는 첫 기사에서 선우종원 검사의 증언을 들었거니와, 그는 "장면 총리의 청탁으로 이홍규 검사가 석방될 수 있었다"고 언급하면서 "이홍규 집안이 대대로 천주교(가톨릭) 집안이므로 빨갱이일 리가 없다"는 이태규씨(이홍규의 형)가 장면에게 했다는 발언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확인 결과 당장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회고록 <아름다운 원칙>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증언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카톨릭에 귀의한 것은 전쟁이 한참 진행중이던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였다. 검찰의 기소가 취소되고 다시 공직으로 돌아간 아버지께서 어느 날 불쑥 '가족이 모두 카톨릭에 입문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신 것이었다. 전쟁중이라는 상황과 어울리게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카톨릭교에 들어갔다."

이 증언에서 우리는 이홍규 일가의 가톨릭 입교가 '좌익혐의 구속사건' 이후 전격적으로 이뤄졌으며, 그것도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추진됐음을 알 수 있다.

이회창 후보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크고 넓고 따뜻한 가슴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람"(<아름다운 원칙> 44쪽) 그 자체였다. 더욱이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아버지의 신조는 '너희들의 장래는 너희들이 결정하라'는 주의였다"(<월간조선> 1997년 2월호)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민주적이었던 아버지가 종교 선택의 자유를 무시한 채 어느 날 불쑥 "가족이 모두 가톨릭에 입문한다"는 "명령을 하달"하고, 온 가족이 "일사불란하게" 복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 이회창 후보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우회적으로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그때 입문했다고 해서 내가 당장 진짜 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자발적인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형님과 농담으로 그런 말도 했었다. 아버지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지만 이건 종교를 갖게 되는 썩 좋은 방법은 못 되는 것 같다고."

거기에는 다른 '절박한 이유'가 있었거니와, 우리는 이홍규 일가의 가톨릭 입교가 당시 정치권의 거물 장면 총리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간조선> 2002년 6월호에는 '집중인터뷰-한일 막후 괴물(怪物) 최서면의 현대사 비화'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이 기사 중 '장면의 대자(代子),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옹 추억'이란 항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최서면씨는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는 모르지만, 그의 부친 이홍규옹은 잘 안다고 했다. 그가 이옹을 만날 때인 1955년은 이옹이 서울고검 검사 시절이다.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지도자들은 각계를 망라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던 때였다. 장면 박사와 노기남 주교는 이홍규 검사를 최서면씨에게 소개했다."

이 기사에는 이밖에도 다음과 같은 흥미진진한 대목들이 나온다.

"이홍규는 1951년 총리로 있던 장면 박사를 대부(代父)로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가톨릭에 입교한 가톨릭 신자", "(한국전쟁 전후 당시) 가톨릭은 좌익의 '보호색'이자 '반공'을 상징하는 최고의 보증수표", "이홍규가 얼마만큼 이승만 치하에서 고통받던 천주교를 보호해 주었느냐", "자유당 정부에서 장면 박사를 이모저모로 치려고 장난할 때, 중대한 국면마다 이홍규가 부장검사니까 몰래 알려 줬다"

결국 이홍규씨는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자 정치적 후견인이 된 장면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그리고 '좌익혐의자'라는 치명적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톨릭 입교를 '보호색'과 '보증수표'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장을 위해 노기남 주교와 장면 총리 등 가톨릭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양성한 가톨릭 인맥에 합류하는 동시에 이승만 정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비밀리에 장면의 정치적 생존과 성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개신교 신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 총애를 받았던 오제도 검사(영락교회 계열), 가톨릭 신자인 장면 총리와 정치적 생명을 함께 한 이홍규 검사.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사상전쟁(?)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종교전쟁(?)의 성격도 깔려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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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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