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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타작 하는 날>
ⓒ 사계절
컴퓨터도 장난감도 없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무얼 하며 지내고 어떻게 놀까? 농부이자 동화작가, 농민 운동가이기도 한 윤기현 씨가 농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이야기를 간만에 동화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나는 오래 전에 그가 쓴 <서울로 간 허수아비> <오늘의 아모스>를 읽은 적 있고, 농민 시위현장에서도 그를 심심지 않게 먼발치에서나마 볼 기회도 있었다. 작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농촌을 사랑하며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한 평생 애써왔는가를 잘 알 것이다.

이런 그인 만큼 많은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글 따로 삶 따로가 아니어서 작품에 신뢰도를 더해 주고 있다. 더욱이 농촌을 다룬 숱한 이야기들이 더러 현실을 왜곡, 과장하고 그야말로 동화로 그치는 경우가 많은 이때에 그가 오랜만에 내놓은 이 작품은 더욱 값지게 다가왔다.

이 책은 석이와 석현이 형제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이 시골에서 살면서 보내는 일상의 풍경을 여섯 꼭지의 단편으로 이야기해 준다. 컴퓨터나 게임기가 없어도 마음껏 뛰어 노는 시골 아이들 모습을 작가가 도시의 아이들에게 전해주려는 의도에서 쓴 동화다. 그렇다고 해서 꼭 도시 아이들만을 독자로 한계 지을 수는 없다. 시골이든 도시든, 아이나 어른이일지라도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독립된 단편이지만 또한 그대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읽기에 자연스럽다. 비오는 날, 석이와 석현이는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바라보며 빗방울로 인해 생기는 물방울로 놀이를 한다. 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고 어머니는 마실 가셨다. 비가 내리는 날임에도 아이들은 물방울을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놀이를 만들어 한나절을 심심지 않게 보내는 모습이 한없이 정겹다.

시골 아이들은 특별한 오락 기구가 없어도, 자연 속에서 혹은 부모님 일손을 도우면서도 재미있는 놀이를 잘도 만들어낸다. 보통 시골 아이들은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거들 때가 많은 법이다. 바쁜 농번기에는 "부뚜막의 부지깽이도 일을 한다"지 않던가.

"보리타작하는 날"에 실린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석이와 석현이는 아침부터 보리를 널어 말리는 어머니의 일손을 거든다. 보리나 나락을 햇볕에 널어 말리는 일은 그냥 보기에는 쉬워도 실상 여간 힘들다. 먼지와 얼룩도 둘러 써야하는 건 당연하고, 아직 덜 마른 무거운 가마를 비워 비닐 포장에 고루 고루 펴서 널어야 한다.

석이 형제는 아침을 먹자마자 보리 너는 어머니를 돕고 오후에는 챙겨주신 새참을 들고 콤바인으로 보리 베는 아버지가 계신 들로 향한다. 아버지와 콤바인 기사가 새참을 드실 동안은 콤바인을 가지고서 운전하는 흉내를 내다가 기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직접 운전대를 잡고 몰아 보는 신나는 경험도 하였다. 일 하면서도 이렇게 놀이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시골이라고 늘 목가적인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녁 텔레비전 9시 뉴스에는 수백 수천 만 원짜리 골프채와 가구, 자동차 등 수입 사치품이 극성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는가 하면, 석이네 아버지는 이웃집의 빚 보증을 섰다가 어려움에 처한 나머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 구타로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는 일도 벌어진다. 농가부채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촌의 가슴아픈 현실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가 시골에서 사는 아이들의 밝고 건강한 모습을 그리고 있으나, 이처럼 그 어두운 면도 놓치지 않고 숨김없이 드러낸다. 도시화, 근대화로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여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촌,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시골의 정겨운 이야기들을 작가는 너무 무겁지 않는 수준에서 잘 다루는데 성공하고 있다.

추석 때 고향을 찾은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이 한데 어울러져 마을잔치를 벌이는 모습, 가을에 감을 따서 곶감을 깎아 말리는 풍경도 아름답다. 특히 이 부분은 내 고향이 곶감이 많이 나는 데라 그런지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감을 따는 일부터 곶감 깎는 작업, 곶감을 너무 많이 먹어서 똥구멍이 막혀 그걸 뚫느라 혼이 난 석현이 이야기 등 어느 것 하나 무리하게 과장된 것이 하나도 없다.

어머니는 석현이 형제들에게 감을 따다가 옷에 감물이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시고, 감나무 꼭대기에 있는 감들은 까치밥으로 그냥 남겨둔다. 아무리 까치밥이라고 해도 너무 많이 남겨 놨다며 더 따자는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아서라.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곡식을 잘 챙기지만, 짐승들은 그러지 못하지 않느냐. 사람이 너무 야박하게 굴면 복을 못 받는다"며 나무라셨다. 모두 내 어린 시절에 직접 겪어본 것과 다를 바 없는 훈훈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내용들은 매 장마다 들어 있는 삽화들이 작품의 내용을 너무도 실감나게 잘 묘사해 주고 있어 글 읽는 맛을 한층 돋구고 있다.

흔히 동화라고 하면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을 주제로 하는 것이 많아 현실과의 그 괴리감이 큼을 많이 느낀다. 또 평소에 그런 책들을 많이 접해서인지, 아이들의 구미도 거기에 길들여져 있는 것을 어린이 도서관을 하면서 피부적으로 느끼고 있다. 아무리 좋은 책들을 읽으라고 추천해 주어도 아이들이 식상해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땀흘려 일하면서 자연과 스스럼없이 어울러지는 건강한 동화들이 더욱 많이 나와야 하고, 이런 동화들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널리 읽혀야 한다. 그래야 농촌도 외롭지 않을 것이고 도시의 아이들도 동화를 읽으면서 삶의 깊이에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보리타작 하는 날

윤기현 지음, 김병하 그림, 사계절(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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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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