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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자태를 자랑하는 촨주스(川主寺) 전경. 뒤편으로 마니통을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보인다
단정한 자태를 자랑하는 촨주스(川主寺) 전경. 뒤편으로 마니통을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보인다 ⓒ 모종혁
"여기서 지우자이꺼우까지는 4시간이 채 안 걸리지만, 지금 이 시간에는 그 곳을 향하는 버스가 없어요. 교통도 불편하니, 우리와 함께 움직이죠. 버스비 따로 내라는 소리는 안할 테니." "이봐요, 한국학생. 같이 가면서 한국에 대한 얘기나 좀 해줘요. 이거 중국어 잘 하는 외국인을 만나기도 힘드니, 같이 타고 가면서 한국 얘기나 실컷 들읍시다." "송판에 머물러 더 볼 것 있나요? 바로 지우자이꺼우에 함께 가죠."

어렵게 알게 된 말 통하는 외국인과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사람들은 호의로 권유를 했지만, 송판에 산재한 라마불교사원을 볼 계획을 지녔던 필자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버스비를 내기 위해 인민폐 100위안을 꺼내 가이드에게 주었지만, 한사코 받길 거절했다. 여기에 버스기사까지 "자리가 비어서 태워준 것인데, 무슨 돈이요? 낯선 땅에서 배낭여행 하는데 더 필요할지 모르니 그냥 집어넣어요. 자꾸 그러면 화냅니다"라고 '위협'까지 했다. 어정쩡하게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필자를 가이드는 숙소를 빨리 정해 푹 쉬라면서 떠밀다시피 내리게 했다. 떠나가며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소리치는 가이드와 여행단 일원이 탄 버스가 사라질 때 손을 흔든 필자는 배낭을 메고 어제 묵었던 송판초대소를 향했다. 갈수록 정이 메말라지고 이해 타산적인 사회로 변모해 가는 중국에서 풋풋한 인정을 베푸는 사람들을 만난 필자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버스 놓치면 2~3시간 기다려야

6월 24일 전날 산행을 한 피로탓인지, 눈을 뜨니 시계는 어느덧 7시를 가리켰다. 서둘러 일어나 짐을 챙기고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뒤 다음 목적지인 라마불교 사원 촨주스(川主寺)로 향했다. 송판 시가지에서 촨주스까지는 6km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편을 이용해야만 한다. 송판에서 난핑(南坪)까지 향하는 버스는 하루에 5,6차례 밖에 없어서, 한 번 차를 놓치면 3~4시간 기다린 후 다음 차를 타야 한다. 아침 8시 송판버스터미널에서 난핑으로 떠나는 버스를 탄 필자는 차장에게 촨주스에 도착하면 알려줄 것을 여러 번 부탁했다. 이렇듯 귀찮아하는 차장을 붙잡고 연거푸 부탁했던 이유는 잘못해서 목적지를 그냥 지나치면 수 km나 떨어진 다음 정거장에서 되돌아오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한 10분쯤 달렸을 때 차장이 "촨주스!"라고 필자에게 크게 소리쳐 알려줬다. 이미 반바지와 티셔츠만 입은 행색으로 주목을 끌었던 필자는 승객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먼지 휘날리는 버스를 떠나 보낸 뒤 정거장을 둘러보니 썰렁한 주변 풍경에 황당함이 느껴졌다. 송판일대에서 가장 크다는 촨주스가 눈앞에 펼쳐져야 하는데 옹기종기 모여있는 농가 외에는 어느 것도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정거장에 있는 몇몇 티베트인들에게 촨주스가 어디 있는지 물어야 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이 필자의 중국어를 알아듣고 한 방향을 가리키며, 정거장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m정도 더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가르쳐준 방향의 티베트인 마을을 가로질러 15분을 걸었을까. 아담한 크기의 불교사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송판 최대의 라마교사원, 촨주스

촨주스(川主寺)에서 만난 두 티베트인 할머니. 필자에게 서글픈 기억을 남겨주었다
촨주스(川主寺)에서 만난 두 티베트인 할머니. 필자에게 서글픈 기억을 남겨주었다 ⓒ 모종혁
촨주스는 송판 일대에서 가장 큰 라마교 사원으로 17세기에 창건됐다. 라마교는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14대 달라이 라마가 우두머리로 있는 거루(格魯·Gelug)파를 비롯, 닝마(寧瑪·Nyingma)파 거쥐(喝擧·Kagyu)파 사가(薩迦·Sakya)파 등 4대 종파가 있다. 촨주스는 이 가운데 황교라 불리는 거루파에 속하는 사찰이다.

청대 건립된 촨주스는 한때 서른 칸이 넘는 큰 절간으로 200명에 달하는 라마승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쓰촨내 라마교 사원이 걸었던 운명처럼,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의 방화로 사찰은 잿더미로 변했고 그 많던 라마승들은 모두 쫓겨났다. 1988년에야 대웅전을 중심으로 중건된 사찰은 이전의 영화를 되찾기에는 너무 초라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필자는 청뚜 지아통호텔에서 독일인 여행자가 남긴 메모를 보고 일부러 들른 촨주스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사원을 보기 위해 하루를 낭비하다니…' 밖에서 바라본 촨주스의 모습에 사찰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이왕 온 것 구경이나 하자고 입장료 2위안을 내고 들어섰다.(1999년부터 관광상품을 이용하는 여행자는 촨주스가 투어코스로 들어가 있어 무료로 볼 수 있다. 중국 표준어에 능통한 승려가 가이드를 대신해 따라다니며 자세히 설명해준다)

입구에서부터 바로 눈에 꽉 차오는 대웅전은 전통적인 티베트 라마사원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베이징(北京) 일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티베트양식과 중국양식의 혼혈식인 듯한 색채가 뚜렷했다. 이것은 쓰촨 대다수 불교사원, 즉 라마교이든 선종불교든 티베트와 중국의 건축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어 쓰촨 특유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이기도 하다.

수고비를 요구한 두 티베트인 할머니

자신의 소원이 적힌 부적을 넣은 '마니통'을 돌리는 몇몇 티베트인의 모습이 보일 뿐, 한가롭고 조용했던 촨주스에서 필자의 등장은 약간의 파문을 일으킨 듯 싶었다. 호기심에 가득찬 아이들이 다가와 빤히 쳐다보는가 하면 어른들 또한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의 거동을 일일이 주목했다. 비록 필자가 천주교신자이긴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듯이 먼저 마니통을 어루만지면서 여행의 무사평안을 빌었다.

이어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필자 뒤를 따라 마니통을 돌리던 두 티베트인 할머니가 손짓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혹시나 외국 시사잡지에 종종 등장하는 티베트 기행문처럼 14대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야릇한 긴장에 휩싸였다. 티베트어로 무슨 말을 하는 듯 같은데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연이어 필자의 카메라를 가리키면서 말을 하는 두 할머니의 뜻이 아마도 사진을 찍어달라는 듯 싶었다.

'산간벽지에 사시는 분들이라 사진 찍을 기회가 없었겠구나. 그래, 저렇게 원하시니 한 장 멋지게 찍어드려야지' 흔쾌히 응답한 필자에게 할머니들은 따라오라며 대웅전 오른쪽의 벽으로 가더니 나름대로 포즈를 취했다. 없는 실력에 두 할머니의 전체 모습을 잡아 사진을 찍은 필자는 필기도구를 꺼내 주소를 적어달라고 요청했다. 사진을 현상해서 꼭 부쳐드리겠노라 약속을 하면서.

헌데 할머니들은 자꾸 필요없다고 하면서 무언가를 계속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고민하는 필자에게 주변에 있던 한 꼬마가 소리를 쳐댔다. "돈 줘요, 돈!" 아, 그랬던가…. 그제서야 모든 전후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티베트인 할머니는 중국인이나 외국인 여행자의 사진모델이 되어 아르바이트(?)한 경험이 있던 것 같았다. 필자에게도 초상권을 팔았으니 수고비를 요구하는 것이리라.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안타까운 슬픔이 밀려 왔다.

라마불교의 종파와 쓰촨

한국에서 티베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히 피상적이다. 지난 몇년동안 국내를 시끄럽게 했던 14대 달라이라마의 방한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은 같은 이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티베트의 영역범위에 대한 인식이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지금 중국 영토의 일부분인 '시장티베트인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Tibetan Autonomous Region)는 과거 티베트의 전체 영토에 1/2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전체 국토의 1/5을 차지하는 티베트의 명확한 영역이해 없이 티베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대하면서 거친 고산지대에 사는 티베트인들의 생활방식은 티베트의 수도 라사나 동부, 중부, 서부가 각기 판이하고 서부의 쓰촨 내에서도 각 지역마다 독특한 개성을 유지하고 있다.

티베트인 스스로를 부르는 표현 또한 가지각색이어서, 중부지방 사람들은 '보빠'(博巴)라 자칭하고 서부지역은 '깡빠'(康巴)라고 한다. 지금의 칭하이(靑海)성과 간쑤(甘肅)성, 쓰촨 서북부에 사는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안뚜어와'라 부르고, 쓰촨 일부 지역에서는 '지아룽와'라고도 자칭한다. 언어학적 방면에서 또한 티베트어는 티베트-미얀마어계이긴 하지만, 크게는 3가지에서 많게는 수십 가지까지 다양한 방언이 존재한다. 웨이장(衛藏) 깡(康) 안(安)으로 대표되는 3대 방언은 거의 외국어나 다름없어 대화소통에 어려움이 크다. 문자의 경우 7세기초 분열된 티베트를 처음으로 통일한 영웅 송첸간포(松贊干布)왕이 창건한 자모문자가 지금까지도 전체 티베트지역에 널리 쓰이고 있다.

티베트를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고리는 라마불교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다. '라마'(喇 )는 티베트어를 중국어로 음역한 것으로 '스승' 혹은 '윗사람'이라는 뜻이다. 불교가 갓 전래됐을 당시 티베트인들은 사찰의 우두머리나 고승들을 라마라고 높여 부르고 일반 승려들은 '짜빠'라 불렀다. 그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라마' 한 단어로 통일하게 된 것이다. 티베트에서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대략 7세기경으로 인도에서 직수입되기도 하고 중국에서 건너오기도 했다. 초기 티베트 본래의 다신숭배적인 원시신앙과 큰 마찰을 빚던 불교는 고원지대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 융합하면서, 10세기경에 와서는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지닌 라마불교가 형성된다.

거대한 티베트 영토만큼 전래 경로도 다양했던 불교는 중국과 인도에서 들어온 승려들의 교파가 서로 달랐다. 티베트 승려들이 불법을 배우고 불경을 번역하며 제자들은 양성하는 것도 역시 그 갈래를 달리했다. 이런 연유로 각 교파들은 서로 자기의 깃발을 내걸고 자신들이 남보다 낫다는 것을 표방하고 나섰다. 여기에 각지에 할거했던 다양한 지방 토호세력들과 결탁을 하면서 '정교합일'(政敎合一)이라는 사회체제를 갖추게 된다.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티베트인의 정신세계와 생활문화를 지배하는 라마불교 종파는 거루파, 닝마파, 거쥐파, 사가파 등이다. 외부 세계인들이 라마불교 전체와 동일시하는 달라이 라마는 바로 거루파의 우두머리이다.

현존하는 라마불교의 가장 오래된 종파는 닝마(寧瑪·Nyingma)파이다. 11~12세기 고승 슈오츄웅빠와 주어푸빠에 의해 창립된 닝마파는 8세기 인도 승려인 연화생(蓮花生)을 창시자로 받든다. 이들은 옛 티베트에서 성행되었던 주문을 숭상하고 그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주된 과업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립 당시 새로운 불법을 숭상하는 기타 교파와 대립되었기에 낡은 교파, 즉 '닝마'파라 불리게 되었으며, 승려들이 모두 붉은 모자를 썼기 때문에 '붉은 모자 교파' 또는 '홍교'(紅敎)라고도 불린다. 쓰촨 내에서는 더거(德格)의 주칭스(竹慶寺), 바이위(白玉)의 시아투어스( 拖寺), 깡띵(康定)의 진깡스(金剛寺) 등은 모두 닝마파 사찰이다. 이 중 시아투어스는 닝마파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사원으로, 최전성기에는 140여간의 건물과 300여백에 달하는 승려들이 수도했었다. 사아투어스 역시 1958년 중국의 대티베트 정화작전시 사원 일부가 파괴되었다 82년 다시 중건하여 개방하였다.

거쥐(喝擧·Kagyu)파는 마얼빠, 미라르빠가 창시한 종파로 '거쥐'는 '입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이 교파는 불법을 구두로 전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기에 힘쓰고 경전을 중시하지 않는다. 거쥐파의 승려들은 불법을 닦을 때 흰 옷을 입었기 때문에 '백교'(白敎)라고도 불린다. 라마불교에서 활불환생(活佛還生)제도를 가장 먼저 실행한 거쥐파는 일반 승려들이 모두 남자인 반면에 사찰의 주지가 여승인 '샤딩스'(沙丁寺)라는 절이 있다. 오늘날 티베트 카즈에 있는 이 사원의 주지를 '두어지파무'라 부르며 라마불교의 유일한 여활불로 받들어 모신다. 쓰촨에서 이름난 거쥐파 사원으로는 량탕(壤塘)의 중량탕스(中壤塘寺)가 있다.

티베트 사가(薩迦·Sakya) 지방을 중심으로 교파가 발흥한 사가파는 사찰의 벽에 홍·백·남 세 가지로 칠을 하기 때문에 '화교'(花敎)라고도 불린다. 사가파의 창시자는 티베트 콴(款)씨 가문의 후예인 궁췌지에부로, 11세기 사가에 절간을 지우고 스스로 교주가 되었다. 이 교파의 승려들은 혼인하여 자식을 둘 수 있는데 자식을 낳은 뒤에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찰의 주지를 가족에 따라 전승하는 제도도 확립했다.

이에 따라 정치와 종교 두 가지 권력을 한 가족에 집중시킨 전범을 만든 것이다. 원대에 가장 강력했던 사가파는 5대 교주인 바스빠가 원의 제사(帝師)에 봉해지고 티베트의 실권을 장악하는 정교합일의 지방정권까지 성립시켰다. 하지만 14세기에 등장한 거루파에 의해 대체되고 사가와 쓰촨 더거에만 그 세력이 축소되었다. 더거의 껑칭스(更慶寺)는 인경원(印經院)을 포괄하는 중요한 사찰이다.

'계율을 잘 지킨다'는 뜻의 거루(格魯·Gelug)파는 라마승들이 누른 모자와 옷을 쓰고 입기에 세칭 '황교'(黃敎)라고도 한다. 라마거루파는 불교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교파인데, 승려들이 계율을 엄격히 지키게 하고 불경을 공부하는 것을 착실하게 순서에 따라하게 하며 종교조직체를 강화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나 판첸 라마가 모두 거루파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이다.

16세기 중엽부터 티베트 전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와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루파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른 세 종파를 훨씬 압도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티베트의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거루파가 잡고 있는 것이다. 쓰촨의 유명한 거루파 사원으로는 간쯔(甘孜)의 따진스(大金寺) 간쯔스·링주어스(靈雀寺), 리탕(理塘)의 창칭춘크얼스(長靑春科爾寺) 등이 있다.

청뚜의 서남민족대학(西南民族學院)에서 불교사를 전공하고 있는 한 티베트인 대학원생(27세)은 필자에게 "간혹 외국인들이 14대 달라이 라마에 대한 견해나 그 분을 결부시켜 라마불교 전체에 대한 묻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말했다. 더거지방 출신으로 닝마파 라마교를 믿는 그는 "14대 달라이 라마는 분명히 모든 티베트인들의 지도자이고 우리 닝마파 사람들 또한 그 분을 존경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입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닝마파 신도들에게는 자신의 교파 지도자가 바로 전 닝마파 신도들을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여서 구태여 14대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원하거나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실소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쓰촨의 티베트인들이 한족(漢族)과 오랫동안 같이 살아 적지 않게 한화(漢化)가 된 것은 사실"이라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라마불교의 정신세계와 우리들만의 독특한 생활문화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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