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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된 아들과 소녀같이 고운 아내를 두고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나야했다.
한 달 된 아들과 소녀같이 고운 아내를 두고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나야했다. ⓒ 황종원
이제 쉰 셋 나이의 아내가 청춘 같던 세월에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 편지를 기다리는 스물 아홉의 아내는 꽃다웠다. 나는 건설회사의 사원이었다.

단칸방에서 잠실 주공 아파트 13평을 전세 얻어 장모님께 아내를 맡기고 내 집 한 칸 마련하려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첩첩이었다. 일부러 3D 업종이라도 돈만 되면 찾아 나섰던 남들처럼 나도 그랬다. 아침 5시 반에서 새벽 1~2시까지 일이 기다리는 생활이었다.

떠난 때는 결혼 1년만이었다. 결혼 기념일 다음날 아이는 태어났고, 백일 안된 아들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받은 아내의 첫 편지를 낡은 종이상자 속에서 문득 보고 펼친다. 이제 군대를 갔다 온 아들 녀석은 그때 젖먹이였으니 아득한 세월 저쪽이다.

지금 이 시간 먼 이국에서 온 사람들, 조선족, 필리핀인, 방글라데시인 등 그들 모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나는 겪어보았기에 안다. 서럽고 괴로운 타국 생활이 얼마나 서러운 가를. 그러나 그 이들도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고생이 삶의 거름이었음도 알리라. 늘그막에 펼쳐보는 낡은 편지에서 새삼 아내 사랑도 확인할 것이다. 편지에서 아내의 향기가 난다.

사랑하는 아빠

무사히 도착하셨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편지 오기를 하루 이틀 기다리다보니 일주일이 지났는데 소식이 늦어지는 것 같아 조급한 마음에 먼저 소식 전합니다.

양쪽 부모님, 동생 외 모든 분들 모두 안녕하시고요. 우리 아가 정태는 하루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답답하고 지루한 날들과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지나고 보면 일년이 빨리 지났다고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여름, 유난히도 더운 이 여름, 밤잠을 더워서 설치는 우리 아기를 달래면서 땀과 눈물 범벅으로 견뎌야 하는 이 지겨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 겨울, 그리고 새봄, 또다시 그 더운 여름이 지나야 오실 아빠.
일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앞으로 다시는 정말 생이별 같은 것은 하지 말아요. 많은 눈물과 서로의 가슴에 아픔을 주는 이런 안타까운 일은 정말로 다시는 하지 말아요.

별안간 달라진 기후 변화도 불편한 점이 많지는 않은지요. 식사는 잘하시는지.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지 모든 것이 궁금하군요. 그리고 저녁 시간은 지루하지 않은지요. 휴일도 보내셨을 텐데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싶어요.

요즘은 편지함에 몇 번씩 가보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됐어요. 그렇지만 아직은 한 통의 편지도 들어있지 않았어요. 몹시도 외롬타고 심심해하는 아빠의 예쁜 아내 숙을 위해서 피곤하고 졸음이 오더라도 자주 편지 주세요. 그것이 곧 아빠의 모습이니까요.

이 편지를 쓰는 옆에서 우리 아가가 새근 새근 잠을 자고 있어요. 아마 꿈속에서 아빠를 만나고 있나 봐요. 웃고 있는 것을 보니까요.
저녁 내내 보채더니 이제는 아주 골아 떨어졌나봐요. 녀석이 보챌 때는 어찌나 고집이 세고 심통이 많은지 엄마와 할머니가 쩔쩔 맨답니다.

창밖에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시간이 제법 됐나 봐요.
이제는 그만 자야겠어요. 그래야 꿈을 꾸지요. 사우디행 비행기를 타고 가는 꿈말예요.

그럼 오늘은 이만 안녕

1978. 7. 31
아빠의 예쁜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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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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