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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속에서 아버지가 혼잣말을 한다.
"오는 길에 국도 변에 개 한 마리가 치어 죽어 있는 걸 봤어. 으깨어져서 아스팔트 위에 착 달라 붙어 있더라고. 살려고 길을 건너던 중이었는데, 살아 보려고 길을 건너던 거였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모두 다섯 명이 유원지로 캠핑을 온다. 텐트를 치고, 밥을 끓여 먹을 도구들을 죽 늘어 놓고, 우선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서 김밥을 꾸역꾸역 먹는 가족들. 어딘지 모르게 허둥대며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치매로 자신이 낳은 자식조차 잊은지 오래고, 누가 챙겨 주지 않으면 끼니 또한 기억에 없는 할머니는 할아버지 허리춤만 잡고 살아온 지 9년이다. 할머니를 돌봐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할아버지는 생활비 한 푼 보탤 수 없었다. 아들에게 더 이상 부담이 되기 싫어 차라리 죽었으면 싶다.

살기 어려워 헉헉대던 아버지는 결국 전철을 타고 가다가 늦동이 막내의 손을 놓아 버렸다. 그래서 여섯 식구 아닌 다섯 식구만 가족 캠핑을 온 것. 당신을 믿는다고, 뭐든지 다 믿는다고 고집스럽게 말하는 아내에게 소리 지르는 아버지. 그저 떠나고 싶을 뿐이다.

이어폰을 꽂고 끊임없이 몸을 흔들어대는 큰 아들. 세상이 보기 싫고 듣기 싫어 그저 귀막고 눈감고 싶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 죽으려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실패의 흔적과 상처만을 가슴에 담은 채 그들은 그래도 텐트를 친 곳으로 돌아온다.

가족. 때론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되어 어깨를 내리 누르며 숨을 막히게도 하고, 때론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돼서 서로를 지탱시켜 주기도 한다.

바람도 막아 주고, 비도 가려 주고, 눈보라 치면 보듬어도 주는 그런 부모가 되고 싶었다며 아들에게 미안하다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그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 그런 아버지가 되지 못했고, 거꾸로 아들에게 '네 엄마의 집이 돼 주어야 한다'고 아들에게 부탁한다.

가족들은 서로 마주 앉아 있어도 서걱거리기만 한다. 각자 다른 곳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겹기 때문이다. "모두를 어디 간 거냐? 어디 간 거야? 얘야, 넌 어디 간 거냐? 넌 대체 어디 가 있는 거냐?" 귀막고 몸을 흔들어대는 아들에게 외치는 아버지의 소리는 지금 우리에게 향해 있는 물음이 아닐까.

돗자리 위에 신문지를 깔고 식탁을 차려 둘러 앉은 네 식구. 할머니는 없다. 이제 여기를 떠나 어떻게 살아갈까. 팍팍한 세상에서 그래도 식구들이 있어 힘을 낼 수 있으려나. 죽는 게 사는 것보다 아무래도 어렵다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연극 속 가족 모두에게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길 위에 있다. 살기 위해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이미 기억을 지워 버리고 현실을 잃어버린 할머니의 몫까지 짊어진 할아버지는 남은 인생이 다른 가족의 짐이라 여긴다. 살기 위해 걸어온 길이 이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삶이란 없는 것, 할아버지는 인생의 끝을 내다 보며 지금 여기서의 소중한 시간을 불도장으로 가슴에 찍어두고 싶다고 하신다.

살기 위해 길을 건너다 목숨을 잃은 개처럼 우리 모두는 살기 위해 길을 건넌다. 그러나 그 길의 중간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해도 노년의 삶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먼저 그 길에 발을 내디딘 그들의 희미한 자국을 따라 우리의 걸음을 옮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에 대한 세 가지 사랑' 연작 시리즈 제1편〈길 위의 가족〉 / 장성희 작, 김영환 연출, 출연 이문수·김재건·권복순 등 / 8. 27∼9. 1 /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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