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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장이 붉으락푸르락하며 교무실로 들어선다.

"이런 미친 놈이 있나. 나 원 기가 막혀서."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큰 소리다. 교무실에 남아 있던 몇 선생이 얼른 고개를 숙인다. '이거 또 무슨 일이람. 어느 반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나? 괜히 얼굴 보였다가 무슨 꼬투리를 잡힐지 몰라.' 그런 표정들이다.

그런 선생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주(학생부장)가 교감 앞으로 다가가더니 휙 한마디 던진다.

"나 이거 더러워서 학주 못하겠어요."

아이들만 학주라고 부르는 줄 알았더니, 자신도 그렇게 부른다는 것에 나는 새삼 놀라는데, 교감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다.

"어이, 허 선생. 이리 와봐요."

교감의 물음에는 대답도 없이 학주가 제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허 선생을 부른다. 이 학교가 두 번째인, 아직 교직 경력이 많지 않은 허 선생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유난히 마음이 여려 아이들 앞에서도 곧잘 눈물을 글썽이는 허 선생이니, 학주의 갑작스런 반말투에 가슴이 콩닥콩닥할 것이다.

허 선생이 기어들어가는 몸짓으로 교감 책상 앞으로 다가가자, 학주가 대뜸 묻는다.

"선생님 반에 박우일이라고 있죠?"
"박우일이요?"
허 선생의 목소리가 떨려나온다.
"아, 박우일이요. 그 멀때같이 키만 큰 문제아 말예요."
"예, 예. 그 애가 또 무슨...."
허 선생이 말꼬리를 흐린다.

"나 원 기가 막혀서. 그 녀석이 말예요..."
학주가 입가에 침을 튀겨가며 하는 말은 이랬다.

우일이라는 녀석이 오늘 5교시 끝난 쉬는 시간에 매점 뒤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렸다는 거였다. 하여 학생부 옆 지도실에 꿇어앉혀 놓고 진술서를 쓰게 했는데, 마침 학생부 교사들 모두 수업에 들어가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되었단다. 수업을 마치고 와보니 녀석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도망 친 거야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이 녀석이 말이야."

그쯤에서 숨을 한 번 들이쉰 학주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허 선생을 잠시 건너다보고 말을 잇는다.

"글쎄 견본으로 마네킹에 입혀놓은 새 교복을 입고 달아났다 이거요."

녀석은 제 낡은 교복을 벗어 마네킹에 걸어놓고, 견본으로 가져다놓은 마네킹의 새 교복을 슬쩍 입고 사라졌다는 거였다.

"내 지금까지 선생하면서 마네킹 교복 벗겨가는 놈은 처음 봤다니까."

학주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투덜댄다. 그 앞에서 허 선생은 자신이 마네킹의 옷을 벗겨가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할 거요?"
학주는 허 선생에게 힐난조로 묻는다.
"제가 잘 지도하겠습니다. 한 번만..."
허 선생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봐달라고 한다.

"봐 주는 것도 한도가 있지. 이건 절도예요, 절도."
학주는 제 말에 열이 오르는지 더 언성을 높인다.

허 선생은 학주가 학생부실로 올라간 뒤 우일이네 집에 전화를 한다. 우일이는 없고 엄마가 전화를 받았는지, 내일 아침에 꼭 아이 데리고 학교로 함께 나오시라고, 와서 학생주임 면담도 하고 사과도 하라고 신신 당부다.

다음날 아침, 교무실에 들어서자 우일이가 엄마와 함께 교무실에 와서 허 선생을 기다리고 있다. 허 선생은 아직 출근 전인지 자리가 비어 있다. 우일이 녀석은 나를 보자 싱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 한다. 옆에 안절부절한 자세로 서 있던 우일이 엄마도 내게 고개를 숙인다.

"임마, 왜 교복은 바꿔 입고 도망쳤냐?"
내가 녀석의 머리를 툭 치며 묻자 녀석이 다시 싱긋 웃는다. 교복 훔쳐간 아이답지 않게 그 얼굴이 맑다.

"제 교복보다 너무 좋아 보여서요. 새 거잖아요."
"그런데 새 교복은 어쩌고?"
사복을 입은 우일이를 보며 나는 의아해 묻는다.
"예 선생님. 이렇게 잘 빨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우일이 엄마가 옆에서 쇼핑백에 넣은 교복을 내밀어 보인다.

그때 허 선생이 들어온다.

"어떻게 됐어요?"
학생부에 다녀오는 허 선생에게 주변의 선생들이 사건의 결말을 묻자 허 선생 생긋 웃는다. 표정으로 보아 잘 해결이 된 모양이다.

"새 교복 마네킹에 걸고, 헌 교복을 다시 입었지요, 뭐."
"아니, 학주가 징계한다고 하지 않아요?"
"사정사정 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어요.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 섭섭했는지, 반성문 일주일에 일 교시는 마네킹 연습하는 벌을 받으래요."
"마네킹 연습? 그게 무슨 벌이에요?"
"헌 교복 입고 마네킹처럼 포즈를 취한 채로 한 시간 있는 벌이래요."
"무슨 그런 벌도 있나? 녀석 마네킹 옷 훔쳐 입더니 결국 마네킹이 되고 마네."

그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린다. 긴장된 교무실 분위기가 일순 풀리는 것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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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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