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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참 씁쓸한 일이로구나, 우리들 살아가는 일이 정말 남루하구나 싶었다. 사회부적응자인 남자와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여자, 그들의 생이 참으로 쓰고 초라하기에 서로를 알아본 그들은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이제 막 교도소를 나온 남자 홍종두. 교도소에 있는 동안 식구들은 이사를 가버리고, 여름에 감옥에 들어가 2년 6개월을 보냈으니 반팔로 거리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가지만 식구들은 노골적으로 귀찮아 한다. 그래도 아무 생각이 없는 종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종두의 뺑소니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은 환경미화원의 딸 한공주. 그녀의 이름으로 장애인 아파트 입주 허가를 얻은 오빠 부부는, 공주를 낡은 아파트에 남겨두고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공주는 누워서 벽에 걸린 오아시스 양탄자를 바라보거나, 거울로 방 안에 들어온 햇빛을 비추며 혼자 논다.

두 사람의 만남과 소통, 사랑, 위기는 어눌한 말투에 쉴새 없이 건들거리는 종두의 몸짓과 마구 꼬이고 비틀리는 공주의 몸처럼 힘들고 위태로워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주변의 사람 누구도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 이전에 관심조차 없다. 공주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을 발견한 공주 오빠 부부, 결국 종두는 잡혀 간다. 아무도 공주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두 사람 사이의 진심과 진실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자기결정권'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와 욕구를 갖고 있다. 설사 행동과 표현에 장애가 있다 해도 자기결정권은 엄연히 존재하며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경찰에 간 두 사람. 어느 누구도 성인인 공주의 자기결정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공주 본인과 종두만 알 뿐이다. 억울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쓰디쓴 현실이다. 휠체어를 앞뒤로 굴려 부딪치며 몸부림치는 공주, 그들의 사랑이 몸 담고 있는 세상이 너무 슬퍼 나는 울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소통은 아프지만 밝고 따뜻하다.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봤기에 망설임없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줄 수 있었을까, 그들의 사랑은 방 안에 들어와 잘게 부숴져 반짝이는 햇빛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우리 가슴을 건드린다.

영화의 한 귀퉁이에서 종두의 어머니를 보았다. 교도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온 아들, 반길 엄두는 내지도 못한 채 "오늘부터 쟤를 어디서 재우냐"하면서 큰 아들 내외의 눈치를 살피시는 어머니. "나는 정말 삼촌이 싫어요, 솔직히 삼촌이 없었을 때는 온 식구가 편했어요"하며 대놓고 시동생을 부담스러워하는 며느리 옆에서 애꿎은 텔레비전 리모컨만 누르고 또 누르시는 어머니.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라고 형제들마저 등 돌린 아들, 어머니는 속상하다. 생각 좀 하고 살라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좀 지라고 소리 지르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여전히 어쩡쩡하게 건들대며 서 있는 아들, 정말 어머니는 속상하고 애가 탄다.

그래서였을까, 가족을 생각했다. 종두를 도저히 가망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가족들에게 종두는 짐일 뿐이다. 또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공주는 가족들이 장애인 아파트의 입주권을 얻을 때나 필요한 허깨비 가족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위안이다, 오아시스다. 가슴 아픈 종두의 어머니도, 때로 사막같은 가슴으로 이 세상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도 그 샘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아시스> Oasis / 감독 이창동 / 출연 설경구, 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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