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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라는 섬에서 새우 양식장을 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남자 아이 해선.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밤마다 이불에 오줌을 싸는 바람에 아버지는 아예 아랫도리를 벗겨 맨바닥에 재우곤 한다.

보통 때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는 법이 없는 아버지지만, 술이 들어가면 무섭게 변해 때리기 일쑤다. 진짜 아버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도, 자기도 왼손잡이인 걸 보면 진짜 아버지가 맞긴 맞는 것 같다.

해선의 하나 밖에 없는 친구는 그림자.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면서 싸우고 화해하고 놀며 이야기하는 게 낙이다. 물개처럼 헤엄을 잘치는 해선은,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동화로 만들어 써내 글재주로도 학교 선생님들을 놀래킨다.

이런 해선에게 세상 떠난 할머니는 늘 그립다. 마을 무당이었던 할머니는 물너울이 섬에 부딪혀 생겨난 물보라 속에서 해선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함께,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들에 얽혀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할머니가 세상 떠난 후에도 서러워 하지 말고, 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구름 보고 달 보고 별 보고 노을 보고 바다 보고 새들 보고 풀잎싹들 보고 이 꽃 저 꽃 보고 마당에 등나무를 보라'던 할머니. 새나 꽃들 속에도, 숨쉬는 바람 속에도 들어 있을 거라던 할머니.

오른 쪽 아래 송곳니가 빠질 듯 빠질 듯 흔들리며 흘러가던 어느 날,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벙어리 여자를 집으로 데려 오고, 며칠 후에는 한 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낯선 남자가 나타나 서로 뒤엉켜 싸운다.

두 사람을 심하게 때리는 아버지를 말리는 해선, 아버지는 기막혀 하며 스르르 주저 앉는다. 그 사람들이 해선의 진짜 부모였던 것. 결국 해선은 두 사람을 따라 섬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배를 타고 떠나던 해선은 벌거벗은 채 배에서 뛰어 내려 '아버지'를 향해 달려오고, 또다시 기가 막힌 아버지는 바깥 화장실이 무서워 밤에 오줌을 싸는 아들을 위해 집안에 화장실을 만들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한다.

기구하고 험한 생을 살아가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어린 아들. 엄마 없이 거친 아버지에게 맞고 사는 아이는 할머니가 있어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무, 꽃, 부엉이, 바닷가의 달랑게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속에 담고 있는 그 무수한 사연들과 목숨 있는 것들이 서로 얽혀 아끼며 사랑하는 그 신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해선이 과연 살아낼 수 있었을까.

해선은 할머니가 뿌려 준 상상의 씨앗을 현실 세계에 싹 틔워 '여느 사람보다 더 많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며' 살게 된 것이다. 그 씨앗이 결국 무섭고 거칠지만 아버지의 마음 속에 담긴 진정을 알 수 있게 해 주지 않았을까.

서로의 마음을 읽었기에 섬처럼 따로 떨어져 각자의 세계에서 살던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는 소통하며 같이 살아갈 수 있겠지 싶다. 그러면 아무리 술 취해도 억센 손으로 아이를 패는 일도, 맞고 우는 아이를 끌어 안고 눈물 흘리며 우는 일도 없겠지 싶다.

예쁘게 핀 꽃들에게 그 예쁜 모습을 좀 보라며 거울을 보여 주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아버지와 아들의 가슴 속에 그대로 살아 이제 서로의 얼굴을 비쳐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닷가 마을의 어린 아이가 경험하는 자연과 할머니에게서 풀려 나오는 몽상적인 이야기 그리고 복잡한 인간사가 얽혀 흥미있게 진행되는 이 소설은 소설 읽기의 깊은 맛과 함께 또 하나의 노년을 그려 보이고 있다.

(물보라, 한승원 장편소설, 문이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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