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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월간 <말> 2000년 12월호와 <오마이뉴스> 11월 28일자에 「옥천은 조선일보로부터의 독립군임을 선언하노라」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던 기사이다. '옥천의 변화된 오늘'을 읽기 전에 우선 '2년전의 옥천'의 모습을 건/곤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이 글이 연재되고 있는 지금 필자는 옥천에서 있었던 지난 2년 동안의 변화를 현지에서 취재하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기사에도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 '안티조선운동'을 공개 천명한 <옥천신문> 1면 머릿기사
ⓒ 월간 말

2000년 11월 4일.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출발한 지 두 시간만에 옥천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에 들어서자 주민 몇 명이 마침 그날 발행된 <옥천신문>을 읽고 있었다. 신문 1면에 가장 크게 고딕체로 뽑혀져 있는 기사 제목은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옥천을 위하여」. 그 아래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 자원봉사자 2백명 돌파…군의원 9명 전원 참여"라는 중간 제목이 보였다.

기자에게 그 기사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다수 지방 의원은 적지 않은 재산을 소유하거나 지역 여론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지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나설 수 있었을까.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주민 중 99.9%가 조선일보 친일행각 몰라

기자는 즉각 사실 확인에 나서기로 했다. 우선 군의원 명단을 입수해 그 면면을 살펴봤다. 유제구 의장과 민종규 부의장을 비롯해 황진상, 정구완, 조경환, 유만정, 육정균, 조이실, 여운룡 의원 등 모두 9명이었다. 마침 유제구 의장이 일본 방문으로 자리를 비운 관계로 민종규 부의장(55)을 만났다. 그는 대청호 상류에 위치한 안남면 출신이다.

▲ 민종규 옥천군의회 부의장
ⓒ 월간 말
―민 의원이 '독립군'에 가입한 것은 사실입니까.(옥천 군민들은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 자원봉사자를 '독립군'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그렇습니다."

―독립군에 가입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독립군들이 전해준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 결심했습니다. 그 책을 읽고 깜짝 놀랐어요. '한일합방은 조선의 평화 위한 조약'이고 '데라우찌 총독은 조선의 대근원을 기초한 위대한 창업공신'이라니…. 조선일보가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언론은 공정성과 정확성을 갖추어야 하는데, 사실 그동안 조선일보는 왜곡과 매도만 일삼아 왔습니다. 그것이 모두 결국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숨긴 채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 아니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전에는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몰랐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런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니까요. 책을 보고 나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됐습니다. 주민들 중에 연세가 많으신 분들에게 확인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어요. 사실 일제시대에 시골에서 누가 신문을 봤겠습니까? 주민들이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몰랐던 것은 당연합니다."

―공직자로서 독립군에 가입하는 것에 심리적 부담감은 느끼지 않았나요.
"옛날에야 몰랐기 때문에 그랬지만 알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역 주민을 대표하는 책임 있는 사람으로서 진실을 알고도 침묵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가 "조선일보 지국이 바로 옆집이라 지국장을 자주 만난다"고 말했다. 기자가 "그에게 항의를 받으면 뭐라고 답하겠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답했다.

"조선일보 문제와 민족정기 문제를 구분해서 보라고 충고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민족정기를 세우자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설득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는 교사 출신의 조경환(52) 의원. 기자는 이원면에 있는 조 의원의 자택을 직접 방문했다. 독립군에 가입한 이유를 묻자, 그도 민 의원과 똑같이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거론했다.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를 읽기 전까지는 식별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제시대에 조선일보가 매국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데는 TV의 영향도 컸습니다. 처음에는 독립군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TV에서까지 조선일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전국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았지요."

- 지금까지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해 정말 몰랐나요.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나도 배운 사람인데, 이런 심각한 사실을 왜 모르고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까.
"물론입니다. 아마 주민 중 99.9%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 독립군은 주민들에게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알리는 한편 구독중지를 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립군 활동방식을 지지하십니까.
"완전히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독중지와 불매운동은 너무 과격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주민들이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잘 모르니, 그것을 지적하고 알리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잘못이었든 실수였든, 조선일보가 친일행각을 정식으로 시인한 뒤 민족 앞에 반성하고 사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일을 안 하겠다고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조 의원이 안티조선 사이트 '우리모두'에 들어간 까닭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우선 독자는 기사를 읽으면서 두 개의 낯선 단어에 강렬한 궁금증을 느꼈을 것이다. '독립군'이라는 용어와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독립군의 정체부터 살펴보자. 앞에서 짧게 설명했듯이, 독립군은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 회원들의 별칭이다. '조선바보'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조선일보가 자행한 반민족 친일행각을 주민들에게 알려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옥천'으로 가꾼다"는 취지로 발족됐다.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33명의 옥천 주민은 지난 8월 15일 「조선일보로부터의 옥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곧바로 조선일보 추방운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인터넷 사이트 '물총닷컴'(www.mulchong.com)과 옥천군 유일의 지역신문인 <옥천신문> 의견광고를 통해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고발하고 있다. '조선바보'에 가입한 사람들을 '독립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군의원들이 읽고 분노를 느꼈다는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는 어떤 책일까. 이 책은 지난 1998년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을 벌일 때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일보 편파·왜곡보도 공동대책위원회'가 편찬한 자료집이다. 이 책은 옥천군 관내 주요 기관이나 지도층 인사들의 책꽂이에는 거의 꽂혀 있는데, 현재 배포된 부수가 거의 1백부에 이른다.

짚고 넘어갈 것이 또 하나 있다. 앞에서 확인한 대로 옥천에선 나름대로 지식과 정보를 갖췄다는 의원들조차 조선일보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일보에 대해 일정하게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사람은 옥천읍이 지역구인 조이실(47) 의원이 유일했다. 그의 발언을 들어보자.

▲ 조이실 옥천군의원
ⓒ 월간 말
"조선일보가 전두환 정권 당시 앞장서서 권력에 충성했다는 것은 평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왜 그 방우영 사장인가 하는 사람이 언론청문회에도 불려나오지 않았습니까? 뭔가 잘못을 했으니까 청문회에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런 그도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 독립군에 가입한 것도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였다. 이런 중대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그는 요즘 안티조선 사이트인 '우리모두'에 들어가서 찾아낸 조선일보 관련 자료를 붉은 사인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다.

이제 평범한 주민들을 만나볼 차례다. 우선 독립군의 활약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조선일보 구독을 중지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중국음식점 '서림반점'. 주인 유동근(44)씨는 최근 조선일보 구독을 중지했다고 증언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그가 조선일보 15년 독자였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 조선일보 구독을 중지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조선일보의 친일행각 때문이었습니다. <옥천신문>에 실린 독립군 의견광고를 보고 그만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 독립군의 권고를 받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 이전에는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몰랐나요.
"전혀 알 수 없었지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 신문은 쉽게 끊기던가요.
"웬걸요. 신문 끊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안 보겠다고 했는데도 두 달 동안 계속 넣어 애를 먹었지요. 경품을 가지고 다니며 판촉 활동을 하는 지국장을 불러서 '그만 보겠다고 하는데 왜 자꾸 넣느냐'고 항의했지만 계속 배달하더라고요. 독립군 본부를 통해 내용증명을 보낸 뒤에야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그게 바로 일주일 전입니다."

파출소 책장에 비치된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옥천읍에 있는 ㅇ파출소. 이 파출소 소장을 맡고 있는 ㅅ 경위는 30년 경력의 경찰관이다. 그는 최근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보아 오던 조선일보를 끊은 것이다. 집에서 구독하던 것뿐 아니라 파출소에서 구독하던 신문도 후배 경찰관들과 논의를 거친 뒤 끊었다는 것이다.

- 구독을 중지한 동기가 궁금합니다.
"선배들이 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30년 가까이 조선일보를 봤는데, 최근까지만 해도 조선일보가 그냥 좋은 신문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를 읽어본 뒤 끊기로 마음먹었지요."(그는 이 책을 파출소에 비치해 놓았다.)

- 그러면 지금까지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몰랐다는 말인가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조선일보 스스로 '민족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생각해보면 내가 철저하게 속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 조선일보 구독을 중지하겠다고 전화할 때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신문을 끊을 정도의 판단을 할 나이는 됐다고 봅니다.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었지만, 알고 나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습니다.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을 위한 조약'이라고 보도한 신문을 어떻게 돈을 주고 보겠습니까."

인터뷰를 마치고 파출소를 나서는 기자에게 ㅅ 경위가 말했다.

"이웃집에도 조선일보를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만 보라고 권할 생각입니다."

▲ 김인철 서각가
ⓒ 월간 말
3년 전 옥천에 정착한 서예가이자 서각가인 김인철(52)씨도 조선일보 절독을 계기로 주변 사람에게 조선일보를 보지 말라고 권할 정도로 의식이 바뀐 경우에 속한다. 그는 기자와 만나자마자 11월 2일부터 조선일보 배달이 완전 중지됐다며 매우 기뻐했다. 그는 부산이 고향이다.

- 구독중지를 요청하는 전화를 했을 때 조선일보 지국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나에게 '이사를 가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조선일보의 친일행각 때문에 구독을 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지요.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 친일행각은 처음 듣는 얘기였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한 얘길 들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 곧바로 배달이 중지됐나요.
"게임이 간단치 않더라고요. 구독중지를 요청했는데도 계속 투입됐습니다. 그런데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다른 독립군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나에게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라는 책 한 권을 전해 주었지요. 그걸 읽어보니까 기분이 영 틀려졌습니다. 조선일보가 우리나라 역사와 정치에 '깨박 놓는'(훼방한다는 뜻) 존재라는 걸 알았지요. 마음을 독하게 먹으니 신문을 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다시 한번 절독 의사를 전달하니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신문 끊는 게 어려운 일이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 옥천에서 조선일보를 몰아내는 운동이 성공할 거라고 보십니까.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백 번 옳다고 봅니다. 나도 조선일보 끊은 것을 계기로 독립군 활동을 도울 생각입니다. 왜 교회에서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이 전도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나의 경험을 들려주고 조선일보를 끊게 하는 것이 나의 '전도'가 될 것입니다. 마침 내가 잘 아는 지인 중에 조선일보를 보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무지의 수렁에서 건져줄 생각입니다."

조선바보 독립군들과의 심야 '모닥불 토론회'

▲ 지난 2000년 11월 4일 '모닥불 토론회'를 벌이고 있는 일단의 독립군들
ⓒ 월간 말
옥천에서 '조선바보' 운동은 생활운동 차원으로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한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됐다. 기자는 식사를 하기 위해 이날 저녁 추어탕을 하는 식당에 들렀고, 다음날 아침에는 올갱이국 전문 식당을 찾았다. 그때마다 주인들에게 "조선일보를 보느냐"고 묻자 이구동성으로 "안 본다"고 답했다.

특히 그 중의 한 사람은 "(조선일보 구독중지는) 주민 모두가 원하는 일인데 어떻게 우리만 볼 수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조선일보 지국에서 구독을 권유하러 왔지만 거절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독립군, 즉 '조선바보' 회원들은 도대체 어떤 활동을 전개했길래 출범 2개월 반만에 이런 수준으로까지 지역 분위기를 바꿔놓을 수 있었던 것일까. 기자는 그 사연과 비결이 알고 싶었다. 독립군 측에 인터뷰를 요청하자 곧바로 응답이 왔다.

이날 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독립군 대원 오한흥(43·<옥천신문> 편집국장)씨 자택으로 독립군 6명이 모였다. '조선바보' 대표로서 '독립군 사령관'으로 불리는 전정표(47)씨를 비롯해 김봉겸 옥천중 교사(38·전교조 옥천지회장), 김성장 옥천상고 교사(42), 조만희 옥천중 교사(44·옥천문학회 회장), 조주현 <옥천신문> 기자(38)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일행은 앞마당에 모닥불을 피웠다. 깻짚단에 불을 붙인 뒤 장작을 얹자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포도주와 소주가 몇 순배 돌자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주제는 단연 조선일보의 친일문제였다. '모닥불 토론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독립군들의 발언을 직접 들어보자.

"지역에선 어떤 활동을 시작할 때 첫인상이 중요합니다. 주민에게 조선일보 문제를 설명하면서 사상과 이념을 거론하면 너무 복잡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화두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조선일보가 만약 독립군 활동에 대해 색깔논쟁이나 마녀사냥에 나선다 해도 이 주제로는 우리가 꿀릴 게 없습니다."

"조선일보가 사상논쟁을 주도하며 동원했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구도는 뭔가 잘못돼 있습니다. 사실 그 본질은 자본주의의 가면을 쓴 친일파와 민족주의의 대결입니다. 조선일보는 일제시대에 '친일'에 전념하다 해방이 되자 살아남기 위해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미군이 친일파를 등용하면서 조선일보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요. 바로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뒤틀린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푸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것은 곧 '친공'으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친일파 문제'를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첫 단추를 정확히 꿰면 이후에는 잘못 꿸 염려가 없습니다. 반대로 잘못 꿴 첫 단추를 그대로 두면 어떤 노력을 해도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입니다. 친일행각이라는 원죄를 집중 공략하면, 조선일보가 현 상황을 아무리 보수와 진보의 대결인 것처럼 몰아가려고 해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MBC에서 안티조선을 주제로 100분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조선일보 문제를 가지고 100분이나 토론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10분이면 결론이 날 주제가 아닌가요? 적어도 옥천에서 우리가 해보니 그랬습니다. 주민들을 설득하는 데는 복잡한 논리나 방대한 정보가 필요 없더군요. 조선일보는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을 위한 조약'이라고 보도했던 신문입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근거가 있었다. 이 날 낮에 만난 민종규 의원과의 인터뷰 과정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기자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고위 공직자나 지식인들조차 조선일보를 두려워한다. (독립군 가입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이해가 안 갑니다. 조선일보가 무슨 국책기관도 아닌데, 공직자들이 왜 눈치를 봐야합니까? 각자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소신껏 일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왜 알고도 여태까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이 알고도 침묵을 지켰다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역사에 죄를 지은 것이라고 봅니다."

옥천경찰서, 옥천군의회도 조선일보 구독중지

사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기자도 할 말이 많다. 월간 <말> 1998년 12월호에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고발하는 기사를 싣자 당시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기자를 가장 혼란에 빠트린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반론이었다.

"너무 오래된 과거의 일이 아니냐?"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을 가지고 새삼스레 왜 그러느냐?"
"조선일보만 친일을 했던 것도 아니지 않느냐?"

솔직히 이런 반응은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에게서도 나왔다. 기자가 이런 사실을 설명하자 한 독립군이 즉각 반론을 펼쳤다.

"그게 바로 한국 지식인의 한계입니다. 그들은 대중의 눈 높이에 맞춰 발언할 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독립군 활동을 시작하며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알고 있는 주민이 적어도 2%에서 5%는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활동을 하면서 확인해 보니 그 비율은 거의 0% 즉 제로에 가까웠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알려주면 99%가 구독을 중지하겠다는 반응을 보였고요. 대중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무능했는가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안티조선'이라는 용어를 안 쓰고 굳이 '조선일보 바로보기'나 '독립군'이라는 말을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주민 중에 '안티(anti)'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 내일 후편(곤)기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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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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