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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리나라는 1960년에는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의 2.9%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7.1%로 늘어났고, 2022년에는 14%에 도달해 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나라들과 견주어 노령화 진행 속도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

‘노화가 시작되는 나라’로 규정되는 기준인 노령인구 비율은 통상 7%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 7%에 도달한 뒤, 이 비율이 2배로 늘어나는 데 22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프랑스가 115년, 스웨덴이 85년, 영국과 독일이 45년, 일본이 25년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우리 사회의 노령화가 얼마만큼이나 급속히 진행될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우리 사회는 노인 인구에 대한 부양과 지원에 대비할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2000년에는 15세 이상의 경제활동 인구 10명이 노인을 1명만 부양하는 데 비해, 2030년에는 생산연령 인구 3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게 돼 부담이 가중될 전망이다.

그러나 노령인구의 부양을 경제·사회적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대응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년에 닥친 개인들이 인생과 우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생론적 차원의 접근법 또한 필요한 것이다.

특히 ‘노인’은 있어도 ‘원로’는 찾아보기 힘든, 이른바 원로부재(元老不在)의 사회가 된지 오래인 우리 현실에서 잘 늙어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 C.)의 <노년에 관하여>는 이런 우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2.

키케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늙음’과 ‘죽음’, 이렇게 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늙음에 대해 말한다. 기원전 6세기 이탈리아에는 밀론이라는 힘이 세기로 유명한 레슬링 선수가 있었다. 올림픽 경기에서 여섯 차례나 우승했을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씨름대회 천하장사를 6연패(連覇)한 것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살아있는 황소를 어깨에 둘러 멘 채 경기장에 들어설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노인이 되었을 때, 젊은 선수들이 연습하는 광경을 보고서는 “아, 이 근육들이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젊은 육체에 대한 선망, 늙고 힘없는 육신에 대한 절망을 토로한 것이다.

키케로는 이 책에서 육신의 힘이 빠졌다고 한탄하는 밀론을 비웃는다. 키케로에 의하면 밀론은 ‘근육’이 죽었다기보다는 ‘밀론 자신’이 죽은 것이다. 밀론은 그 자신에 의해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허파와 근육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력’이 아니라 ‘지혜’라는 것이 키케로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남이야 뭐라 하건 해외 보신 관광을 해서라도 젊음을 되찾으려 광분하는 이 땅의 철없는 노인들에게 키케로는 이렇게 타이른다.

“인간에게 육체의 쾌락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은 없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인간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제어할 틈도 주지 않고 육체적 쾌락의 노예가 되도록 부추긴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새벽잠 줄이기를 소원하던 한 사내가 늘그막에 노화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새벽잠이 줄자 마침내 평생 노력이 결실을 이루었다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의 고양이는 이 남자를 비웃지만, 키케로는 이런 현상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아니, 키케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노년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만약 우리가 이성과 지혜로 쾌락을 거부할 수 없다면 해서는 안 될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노년에 대해 대단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네. …… 내게 대화에 대한 열망을 자라나게 했고 술과 음식에 대한 욕망을 사라지게 한 노년에 대해 나는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네.”

“어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소포클레스에게 성생활을 즐기느냐고 질문했을 때, ‘무슨 끔찍한 말을! 마치 잔인하고 사나운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나는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왔다네’ 라고 그는 대답했지.”


노년에 접어들어 쉽사리 속아 넘어가고 건망증이 심해지며 조심성을 잃는 노인들이 있다. 하지만 키케로는 이러한 결점이 노년에게만 속한 결점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노년에도 두 종류가 있어서 지혜로운 노년이 있는가 하면, 해이해지고 게으르고 흐리멍덩한 노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예의바르고 자제력 있는 젊음이 있는가 하면, 무례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젊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란 이야기이다. 그는 “바보들은 젊은 날의 악덕과 결점을 노년까지 그대로 끌고 간다”고 지적하면서, 노년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키케로에 의하면, 분별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낸 이에게는 지혜로운 노년이 오고, 욕망에 사로잡힌 젊음을 보낸 이에게는 흐리멍덩한 노년이 오게 된다. 노년의 체력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키케로의 다음 말은 과연 일리가 있지 않은가?

“기실 체력의 쇠퇴 그 자체는 노년 때문이라기보다는 젊은 시절의 방탕으로 말미암아 더욱 빈번히 초래된다네. 격정적이며 무절제한 청년기가 노년에게 쇠약해진 육체를 건네주기 때문이지.”


3.

키케로의 글은 바야흐로 ‘죽음’으로 접어 들어간다. ‘늙음’ 이후에 ‘죽음’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키케로의 죽음 및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은,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리오”(未知生焉知死)라고 한 공자(孔子)의 유훈에 충실한 우리의 현세주의적 전통과도 거리가 멀고, 죽음 자체를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현대의 관행과도 배치된다.

그는 “만약 죽음이 영혼을 아주 없애버린다면 죽음은 확실히 무시되어야만 하고, 만약 영혼이 영생할 수 있는 곳으로 죽음이 영혼을 이끌어간다면 오히려 죽음은 열망되어져야 한다네”라고 말함으로써, 언뜻 보기에 죽음 이후의 인간 상태에 관해 두 가지 가능성(영혼절멸과 영혼불멸)을 다 열어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나오는 다음 글들을 읽노라면 그가 영혼불멸의 신봉자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영혼은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매우 높은 집으로부터 내려와서 마치 신성이나 영원성과는 관련이 없는 장소인 지상에 처박힌 것 같네. 그러나 나는 불사의 신들께서 인간의 육체 속으로 영혼을 흩뿌려 놓으셨을 때, 인간들로 하여금 지상을 보살필 뿐만 아니라 천상의 질서를 심사숙고하고 본받아 지상에서의 삶도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이라고 믿네. 이성과 논쟁만이 아니라, 지고한 철학자들의 명성과 권위가 나를 그렇게 믿게 했다네.”

“사고력이 없는 육체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갔을 때, 영혼도 사고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의 혼합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영혼은 맑게 그리고 순수하게 존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현명해진다. ”

“마치 집으로부터가 아니라 여인숙으로부터 떠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나는 삶으로부터 떠난다네. 자연이 우리에게 영원히 거주하는 곳이 아닌, 잠시 머무를 거처를 주셨기 때문이지. …… 오! 영광스러운 날이여! 나는 그때가 되면 영혼들의 저 신성한 집합체 속으로 갈 것이며, 이 시끄럽고 더러운 이승으로부터 빠져나갈 것이라네.”

“나에게는 노년이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유쾌한 것이라네. 인간의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을 믿는 내가 그것을 잘못 믿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잘 못 믿겠네.”


이렇듯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열어두다가 영혼불멸을 지지하는 것은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기실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우의 수가 둘 밖에는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현대인의 사후 시계에 대한 무관심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내세를 인정하고 있는 키케로에게 이 지상에서의 삶을 하늘의 질서에 따라 덕스럽게 살았다면 죽는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지상의 생활을 덕스럽게 살아냄으로써 정화된 영혼이 하늘로 되돌아갈 수 있는 영광의 날이다. 이 지상의 삶을 덕스럽게 살아낸 자에게는 삶이 고통이요, 죽음의 날이 영광의 날인 셈이다.

키케로의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물림’이란 단어이다. 그는 모든 흥미에 대한 ‘물림’이 삶에 대한 물림을 낳게 된다고 말한다.

“어떤 흥미가 유년기에 있다고 하세. 그렇다면 청년이 유년기의 흥미를 바라겠는가? 청년기에 갓 들어섰을 때 느낄 수 있는 흥미가 있지. 그러면 인생의 중간기라고 불리는 중년기는 그것이 필요하겠는가? 중년기에 느껴지는 흥미가 있지. 그러나 노년에 그러한 것이 추구되지는 않는다네. 노년에도 마지막 흥미가 있지. 하지만 앞서 지나간 시기의 흥미가 없어지듯이 노년의 흥미도 없어진다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 삶에 대한 ‘물림’이 죽음의 성숙한 시간을 가져오지.”

키케로에 의하면 ‘유년기의 연약함, 청년기의 격렬함, 중년기의 장중함, 노년기의 원숙함’은 인생의 각 시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특성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바울의 말과도 다르지 않다(고린도전서 13장 11절).

이쯤에서 한국현대사를 노추(老醜)의 황혼으로 물들인 정치판 군상들의 행태를 짚어보아도 좋을 듯싶다. 이들은 나이 70이 되어서도 신념은 유년기처럼 연약하고, 자제력은 고삐 풀린 말처럼 거칠며, 언행은 장중하지 못하다. 그들의 거동은 노년기의 원숙함과는 거리가 아득히 멀다. 끝없는 탐욕과 당리당략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기가 예사이다.

노년에 접어든 그들의 언동에서는 ‘물림’을 찾을 길 없다. 아이들처럼 힘겨루기나 하면서 끝없이 현세에만 탐닉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레슬링 선수 밀론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키케로는 그들의 탐욕과 쾌락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예고한다.

“인간에게 육체적 쾌락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은 없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인간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제어할 틈도 주지 않고 육체적 쾌락의 노예가 되도록 부추긴다. 이것으로부터 조국에 대한 반역이, 국가의 파멸이, 적과의 밀담이 나온다. 쾌락을 좇는 욕망이 악이나 나쁜 행위를 충동질한다. 쾌락이라는 유혹이 강간, 간통, 기타 모든 범죄를 일으킨다. 자연이나 신이 인간에게 정신보다 더 뛰어난 것을 주지 않았으므로 이 신성한 선물에 쾌락보다 더 큰 해를 끼치는 것은 없다.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절제의 여지는 사라지며, 쾌락의 영역에서 덕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 왜냐하면 진실로 쾌락이 넘치거나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영혼의 빛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키케로의 말은 곧바로 비수(匕首)가 되어 우리에게 꽂힌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그들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제어할 틈도 주지 않고’ 권력욕의 노예가 되도록 부추긴다. 이것으로부터 5·18 광주학살과 같은 ‘조국에 대한 반역’이, IMF 사태와 같은 ‘국가의 파멸’이, 총풍(銃風) 사건과 같은 ‘적과의 밀담’이 나온다. 탐욕을 좇는 그들의 욕망은 지역감정 같은 ‘나쁜 행위를 충동질’한다.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절제의 여지’는 사라지며, ‘쾌락의 영역’에서 ‘덕’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탐욕에 눈먼 상태가 오래 지속되다보니 그들의 ‘영혼의 빛’은 이미 소멸되어 버렸다.


4.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에서 유리 세공 일을 하는 니콜라라는 사람이 윌리엄 수사(修士)에게 말하길, 그보다 2세기 전에 만들어진 유리창과 같은 걸 자신들은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겨우 고치는 정도인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옛날의 그 색깔을 낼 수 없거든요. ‥‥‥ 맥이 빠집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옛날 사람들 같은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거인의 시대는 가 버린 것이지요.”

그러자 윌리엄 수사가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요, 우리는 난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난쟁이는 난쟁이로되,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랍니다. 우리는 작지만, 그래서 때로는 거인들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답니다.‥‥‥(하지만) 우리 시대의 식자(識者)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는 표현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가 처음 사용했다. 윌리엄 수사가 인용한 말에서 ‘거인’이란 곧 ‘전통’을 뜻하며, 한 사회의 지적 인프라이기도 하다. 난쟁이는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난쟁이처럼 작지만, 위대한 전통(거인)의 무등을 타고 바라보기에 거인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현대사의 ‘자칭 원로’들이 그처럼 철부지 늙은이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위대한 거인을 갖지 못한, 난쟁이 같은 지적 인프라밖에는 갖지 못한 우리 사회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들이야말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난쟁이들’이 아닐까?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거인’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와 우리 후손들은 이 거인으로 하여금 한국어로 말할 수 있게끔 해준 번역자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M.T. 키케로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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