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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해의 최남단 거문도. 가운데 보이는 다리가 삼호교. 오른 쪽 마을이 거문리이다.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거문리가 있는 고도 세 섬으로 이뤄져 있다.
다도해의 최남단 거문도.가운데 보이는 다리가 삼호교. 오른 쪽 마을이 거문리이다.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거문리가 있는 고도 세 섬으로 이뤄져 있다. ⓒ 조경국
새벽 눈뜨기가 무섭게 여수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아침 8시 출발하는 쾌속선 엔젤호프에 몸을 싣고 두시간 남짓 걸려서 도착한 곳은 여수에서 114.7km 떨어진 거문도.

면적 12㎢,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다도해의 최남단 섬, 전남 여수시 삼산면이 섬의 주소. 그리고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2년 간 점령한 '거문도 사건'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솔직히 거문도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는 것 보다 거문도에서 2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비의 섬 백도를 구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더 컸다. 기암괴석과 다양한 동식물이 어우러진 백도는 날씨가 좋고, 관광선의 수지가 맞을 만큼 손님이 있어야만 관광이 가능하기 때문에 휴가철도 아닌 지금은 좀처럼 보기가 힘든 것도 조바심이 나는 이유였다.

미리부터 욕심을 낸 것이 잘못이었는지 백도로 가는 배를 놓쳐버리고 결국 발길 닿는 데로 거문도를 샅샅이 훑는 도보 답사여행이 되고 말았다. 뙤약볕 아래 물 적신 수건 목에 두르고 고도와 서도(거문도는 고도·서도·동도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오가는 동안 깨닫게 된 것은 일제가 남기고 간 흔적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영국군 묘지. 영국군 묘지. 영국은 1885년부터 1987년까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거문도 사건'을 일으켰다. 원래 9기의 묘가 남아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3기 뿐이며, 해방 후 주민들이 묘비를 숫돌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영국군 묘지.영국군 묘지. 영국은 1885년부터 1987년까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거문도 사건'을 일으켰다. 원래 9기의 묘가 남아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3기 뿐이며, 해방 후 주민들이 묘비를 숫돌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조경국
19세기 중반부터 역사의 현장 첫머리에 있었던 거문도는 중국, 러시아, 일본의 중간 해역에 위치해 인해 19세기 중엽부터 열강의 침입을 견뎌내야 했던 슬픈 섬이다.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군 수병 묘지 뿐 아니라 거문리에는 일제 시대 신사참배 터와 일본식 건물이 있어 거문도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일이란 매우 쉬웠다.


해밀턴 항에 남아있는 영국 수병의 묘비

여객선 터미널에서 약 500 m정도 떨어져 있는 영국군 묘지는 미리 찾아본 사진과는 다르게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묘비 앞 느끼는 감정은 착잡하다. 지금은 사람들이 뜸하게 찾는 관광지이지만 엄연히 침략자의 묘이다. 그리고 외국 군대가 2년 동안 불법 점령했어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던 힘없는 조선의 슬픈 흔적이기도 하다.

거문도는 서양에서 해밀턴 항으로 알려져 있다. 1845년 사마랑(samarang)호를 이끌고 거문도를 탐사한 영국 해군 에드워드 함장이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이후 거문도는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마랑호는 제주도에서 거문도 해역까지 약 1개월 간 탐사한 후 <사마랑호 탐사 항해기(Narrative of the Voyage HMS Samarang)>를 출판했다. 이후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의 극동 항구 블라디보스톡을 공격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거문도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일제 신사의 흔적. 거문리에는 아직 일제 신사 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만든 난간과 석등, 사진의 비석등이 곳곳에 있어 거문도의 역사를 말해준다.
일제 신사의 흔적.거문리에는 아직 일제 신사 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만든 난간과 석등, 사진의 비석등이 곳곳에 있어 거문도의 역사를 말해준다. ⓒ 조경국
영국 내각은 1885년 거문도 선점권 확보를 의결하고, 중국 주둔 함대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도웰 해군 중장에게 거문도를 점령할 것을 명한다. 3척의 군함과 6백 명의 병력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던 거문도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1887년 철수한 후 러시아·영국의 사이에서 중재를 맡았던 중국은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매월 정월 초하루면 이곳에 와서 신사참배를 해야했지"

영국군 묘 뿐 아니라 거문리에는 일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영국군 묘가 관광자료 등에 위치가 상세하게 나와있는 반면 일제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신사 터는 이정표조차 없다. 하지만 상사면 파출소 바로 뒤편에 위치해 찾기 쉽다. 200여평의 넓은 부지에 건물 터와 튼튼하게 지은 콘크리트 난간, 무너진 석등이 당시 화려했을 신사를 짐작케 한다.

"일본인들은 여기 거문리에서 살았어 동도와 서도에는 조선사람이 살았고...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조선사람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했어. 해방 전에는 일본인들도 많아 거문도 인구가 1만 4천명 정도 되었는데, 지금은 3천명이 조금 넘으려나. 당시에는 지나가는 개도 기왓장을 물고 다녔다고 했을 정도로 부촌이었지"

일제가 남기고 간 신사 옛터에서 해방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이기동 할아버지. 일제시대에 거문도는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으며, 일본의 어업전진기지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신사 옛터에서 해방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이기동 할아버지.일제시대에 거문도는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으며, 일본의 어업전진기지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 조경국
거문도 토박이인 이기동 할아버지(77)의 이야기처럼 거문도는 일본인들이 뿌리박고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군복무를 마친 일본인들을 위한 재향군인회관도 외관만 바뀌었을 뿐이고, 삼산면 파출소도 일제시대 지서가 있던 곳이다. 옛 일본인 지주가 살았던 건물도 외형 그대로 노래방과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구를 끼고 있는 거문리의 이층집들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서도 남단에 있는 거문도 등대는 한일합방이 되기 전인 1905년 지어진 것이다. 일본인들이 거문도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일제시대 다까라시마(寶島)라고 불렸던 거문도는 말 그대로 일본인들에게는 보물섬이었다. 거문도 근해는 꽁치·삼치·갈치 등이 무진장 잡히는 황금어장이었고, 일본인들은 잡힌 고기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19세기 뿐 아니라 조선 초기부터 왜구들의 침략으로 거문도의 피해가 극심했고, 세종 때 일본인들에게 거문도 근해의 조업권을 허가해 줬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이 거문도를 거점으로 활동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나마 거문도 사람들이니까 동도와 서도를 지켜낸거야"

"왜 클 거(巨) 글월 문(文)을 써서 거문도인지 아나. 섬이지만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어. 옛날 이름은 삼도·삼산도·거마도였지. 그런데 청나라 제독 정여창(? ~ 1895)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고종황제에게 건의를 했어. 그래서 거문도가 된거야. 증조고조부들께서 붓과 종이로 거문도에 들어온 외국인들과 맞섰지" 거문도라는 이름을 갖게된 유래를 설명하는 박종산 씨(67·전 삼산면장)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조선 후기 유학자인 매회 김양록 선생을 모신 서산사. 거문도에 살았던 유학자인 율은 김유와 매회 김양록은 이곳을 찾았던 러시아 인과 필담을 주고 받아 조선인의 기개를 높였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조선 후기 유학자인 매회 김양록 선생을 모신 서산사.거문도에 살았던 유학자인 율은 김유와 매회 김양록은 이곳을 찾았던 러시아 인과 필담을 주고 받아 조선인의 기개를 높였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조경국
당시 극동에 주둔했던 열강의 함대는 필요에 의해 중국인이나 일본인 통역관을 고용했는데, 거문도를 거쳐갔던 러시아 함대의 중국인 통역관이 러시아 인들과 필담을 나눈 이 지역 유학자 율은 김유와 매회 김양록의 학문의 깊이에 반해 이 사실을 정여창에게 알렸고 결국 '거문도'란 이름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이 동도와 서도를 빼앗지 못하고 고도에서만 생활하게 된 것도 거문도 사람들의 저항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특히 면암 최익현 선생의 제자인 의병장 임병찬이 스승과 더불어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16년 거문도에서 음식을 전폐하고 자진한 것은 이곳 주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렇듯 거문도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단순한 관광지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 거문도. 올 여름 거문도를 찾을 사람들은 거문도의 지난 역사에 관심을 가져 본다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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