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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부황리에 저녁이 옵니다.
하루의 고된 노동이 끝나고 마을의 집들 휴식의 등불 하나둘 켜질 때, 응달짝 상갓집 사립문 밖으로도 등불이 내걸립니다.

오늘 한 생애가 또 마을을 떠났습니다.
상갓집으로 들어가는 길목 주변이 한산합니다.
다른 상가 같았으면 떠들썩했을 것을, 이 집은 제삿집보다도 조용합니다.
도로가로 수백 미터 늘어서 있어야 할 트럭들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노인 혼자 살다 가시는 길이라 살아서처럼 가는 길도 단촐한 걸까요.
세상 인심이나 인정이 다 그런 것일까요.
이곳 사람들이 그처럼 부지런히 애경사를 찾아다니며 챙기는 이유를 이제 사 알 듯도 합니다.

상갓집 문 안으로 들어서자 소식을 듣고 온 마을 사람들로 좁은 집안이 어수선합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마을 할머니들과 아주머니 몇몇이 나물을 다듬고 초상 치를 음식 마련에 분주합니다.

남자들은 돼지 잡을 물을 끓이고, 사립문 입구 밧줄에 묶여 엎어져 있던 돼지는 인기척만 들려도 소스라칩니다.
돼지라고 어찌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생애의 마지막 시간 동안 돼지는 자신을 불태울 장작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봅니다.

솥 안의 물이 끓기 시작합니다.
돼지의 비명소리가 마을의 밤 정적을 깨웁니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정지에서 상을 내옵니다.
"도리상은 안돼. 후손들한테 핼로워."
주변의 노인들이 다들 한마디씩 던집니다.

나는 얼른 마당가에 놓여 있던 네모난 교자상 하나를 가져다줍니다.
둥그런 상에 올렸던 음식물들이 네모난 상으로 옮겨집니다.
사각의 사재상을 들고 뒤 곁 사립문 밖으로 갑니다.

밥과 국, 나물 몇 가지가 전붑니다.
적은 찬으로나마 먼길 온 저승사자 허기진 배를 달래주어야만 노인의 영혼이 곱게 모셔질 수 있을 테지요.

"화장시키는 것이 원인디, 철철지 원인디."
마당으로 돌아오자 노인의 장례 문제를 두고 마을 사람들끼리 옥신각신합니다.

"누가 지사 지내 주리도 없고, 본인이 원했어, 유언했어. 화장 할라고 돈도 모태 났어."
돌아가신 노인의 시누이 되는 할머니가 흐느낍니다.

"화장이 더 복잡해. 저 선산에다 묻으면 될 것을. 육지로 실어가서 화장터로 가고 그게 더 복잡해. 화장 하나 묻으나 다 똑같지 머가 달라."

"그래도 본인의 유언잉게 화장을 해 드리야지. 화장해 달라고 농협에 300만원이나 모태 놓고 가셨는디."

"자석들이 와서 겔정 할 일이지만, 여그다 묻는 기 펜헐틴디."
화장을 하자, 매장을 하자, 주장이 분분하다가, 고인의 유언을 존중해서 자식들이 오면 그때 결정하기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여든 둘의 노인은 틈만 나면 마을 노인들에게 "나 죽거든 화장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는군요.
농협의 홍구 형님한테 부탁해 통장에 저금까지 해두셨다니, 그 소망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일까요.

노인은 자신이 살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겠지요.
살아 설움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친자식들이 없으니 묘가 있어도 돌볼 이 없을 것을 염려했겠지요.
죽어서마저 홀로 쓸쓸한 유택을 지키고 싶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저녁 참, 농약 잡수시기 얼마 전에도 가깝게 지내는 할머니에게 거듭 거듭 화장해달라고 당부를 했겠지요.

돼지 삶는 냄새가 온 상갓집 마당에 진동합니다.
마당 구석에 윷놀이 판이 벌어졌지만 모여든 사람이 적어선 지 그마저 조용합니다.
젊은 사람들 몇몇은 담 밖 마늘밭에 불을 피우고 돼지 내장을 구워 술잔을 돌립니다.

나는 노인이 끝내 수확하지 못하고 간 마늘밭에서 마늘 몇 개를 캐다 불 속에 던져 넣습니다.
마늘 구워지는 냄새가 구수합니다.

내장을 굽던 상일이 형님이 잘 구워진 돼지 내장을 한 점 건넵니다.
나는 손을 젓습니다.
내장 대신 불 속의 마늘을 꺼내 들고 쓴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마파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비가 오시려는가.

"영랙 없이 마파램이 부능구만. 배 못 다녀, 이 집 자석들 몬 오게 헐라고."
사립문 밖으로 나오던 노인 한 분이 하늘을 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립니다.

"이르다 동네 사름들만 상 치리게 생겠어. 지지리 복도 없는 할망구 같으니."
쓸쓸한 섬 마을, 상갓집의 밤이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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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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