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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서 저녁 식사중인 캠프 참가자들
야외에서 저녁 식사중인 캠프 참가자들 ⓒ 강혜원
작년 이맘 때 즈음, 나는 약 6개월 동안 핀란드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 전혀 낯선 북쪽나라 핀란드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고 무척이나 가슴 설레였다. 다음날 SCI-핀란드의 자원활동가 집에 머무르면서 리후(Rihu)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내가 핀란드의 생명농법(biodynamic)을 하는 농장에서 자원 봉사자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SCI와 핀란드SCI 사이의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SCI(Service Civil International)는 주로 국가 간의 자원봉사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평화와 인권 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국제적 단체이다.

자일리톨 껌?

핀란드 사람들과의 첫 만남의 어색함을 덜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핀란드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 별로 없었던 지라 떠나기 한달 전에 급하게 배운 핀란드어 몇 마디를 써 가며 친해질 꺼리들을 찾곤 했었으니까. 이러한 '꺼리들' 중에 자일리톨 껌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 워낙 자일리톨 껌으로 핀란드가 유명(?)해졌기에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당신네 나라 핀란드가 껌 광고로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다고. 그러나 결론은 이를 닦은 후에 자일리톨 껌을 씹고 자는 사람들은 현지엔 없었으며(최소한 내가 묵었던 동네에선), 그래서 오히려 그러한 얘기를 꺼낸 내가 좀 실없는 사람처럼 보여졌다는 것이다. 어찌나 민망했던지…. 그후 자일리톨 껌 광고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새로운 농사일에 대한 걱정과 기대로 여름을 맞이했다.

리후 농장의 생명농법

내가 일을 했던 리후의 농장은 생명농법(Biodynamic)이라는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곳이었다. 생명농법은 보통의 유기농법과 같이 일체의 화학농약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땅의 활동력을 높이고, 좋은 작물을 얻기 위해 농부 스스로 자연적 비료를 만들어 사용한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언제나 일손이 많이 필요했고, 때문에 항상 외지(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이라서 한가지 종류의 단일 작물을 많이 기르기보다는 다양한 채소와 감자 같은 기본적 작물을 두루두루 기르고, 나머지는 그 마을의 유치원과 복지원, 환경과 먹거리에 관심 있는 개인들에게 판다.

리후의 농장은 농장주인 아르토(Arto, 애칭 아파(Afa))와 리사(Liisa)의 살림터이인 동시에, 생명농법과 관련한 공동체의 자연 실습장이기도 하다. 그 공동체의 지역 대표이기도 한 아파와 리사는 스웨덴에서 생명농법에 관해 공부를 하고 리후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농장을 자연학습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개방해 놓고 있었다.

핀란드 및 주변 국가(주로 독일과 에스토니아, 러시아)에서 대안적 먹거리와 농사 방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깨끗한 먹거리를 사 가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도시에서) 내려와 세미나도 하고, 직접 농사도 짓는 경험을 하고 간다. 이러한 모임은 의사나 영양학자들이 함께 하기도 하지만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다.

또한 이곳은 일종의 대안학교인 스타이너 학교(Steiner’s school)의 학생 실습장이기도 하다. 스타이너 학교의 5학년 이상 학생들은 매 학기마다 숲이나 농장에 가서 직접 체험을 하는 실습과정이 의무적으로 주어진다. 2주 정도의 기간동안 그들은 직접 농부를 도와 일을 하게 되는데, 봄에는 씨뿌리기, 묘판 정리하기 등의 일을 하고, 여름에는 김매기, 온실에 물 주기, 꽃가꾸기 등등의 일을 한다. 내가 있는 동안에 왔던 학생들은 늦여름에 왔었기 때문에 주로 수확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고 갔다.

채식주의에 대한 다양한 생각

리후 농장에서는 매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2주 동안 여름 캠프(workcamp)가 열린다. 중장기 자원봉사 일과는 달리 유럽 각 국에서 모인 15명 이내의 젊은이들이 농번기의 농장에 모여 일을 도와주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서로 다른 국적과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경험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중 채식주의와 관련된 토론은 먹거리와 관련하여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캠프 참가자들 중 6명이 채식주의자였고, 그중 3명 정도가 베이건(vagan: 육류는 물론 우유, 버터, 치즈와 같은 유제품과 계란류도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매 식사 때마다 리사는 그들을 위한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야 했고 그것은 채식주의자와 베이건을 위한 당연한 배려였다. 캠프 초기,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언제나 채식주의자에 관하여 토론이 있었다.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느냐 하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부터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등등의 얘기들이 한동안 매일 오고 갔다.

아일랜드에선 온 티나는 채식주의자이자 베이건이다. 그녀는 언제나 음식에 대해 까다로웠고 항상 자신의 입장에 대해 당당했다. 티나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나 동물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채식주의가 일종의 일상적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소와 돼지와 닭들이 길러지고 관리되고 결국엔 대형 슈퍼마켓에서 팔리고 마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 아닌, 이윤을 위한 상품으로 취급받는 현실에 대한 하나의 유의미한 저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즉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기라는 상품'을 사지 않기도 하는 것이었다.

캠프가 끝난 후, 나는 아파(Afa)와 채식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 한때 철저한 채식주의였다고 말한 그는 왜 다시 육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말은 채식주의는 도시에서만 생활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시골에서 소 및 다른 동물들과 함께 사는 사람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잡식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느낄 수 있고,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한 동물들이(소, 돼지, 닭 등) 결국 고기로서 남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혀 자연적으로 이상한 일로 받아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사는 경우 육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했다.

반가운 생태전달자 - 에코 메신저

유럽의 각국 SCI에 의해 조직되는 캠프는 환경, 여성, 인종주의, 난민, 아동 등 각기 나름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핀란드에서의 캠프는 이미 말했듯이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제면에 있어서는 '환경' 관련 캠프로 분류된다. 에코 메신저(Eco Messenger, 생태전달자)는 유럽 각 국의 환경 관련 캠프에 방문해서 환경 관련 교육 및 토론회를 조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캠프에 찾아온 에코 메신저는 불가리아 출신의 환경운동가로 환경 토론회를 주최하고, 각 국의 환경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먹거리 소비에 관한 토론, 전지구적으로 심각해지는 환경문제에 대한 교육, 캠프 기간에 할 수 있는 일상적 실천 항목의 고안 등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에코 메신저와의 만남 이후 많은 캠퍼(camper) 친구들은 항상 어딜 가든 '환경 문제'에 신경을 쓰는 민감함(?)을 보였다. 한여름 더운 날에 일을 할 때에는 물 마시는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사람이 워낙 많고 일하러 들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물을 마실 때에는 주로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이용하곤 했었다. 하지만 에코 메신저와의 만남 이후 일회용 컵 한 개로 서로 서로 번갈아 마신다던가, 한 개를 여러 번 사용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나름의 노력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화 나누기, 이해와 평화의 출발점

캠퍼(camper)들 중에 터키에서 온 탄스(Tans)와 그리스에서 온 스피로스(Spyros)는 가장 뛰어난 분위기 메이커(?)였다. 농담도 잘하고 친구들끼리 모이면 언제나 재미있는 사건들을 만들어 내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 주는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지만 터키와 그리스는 가운데 키프로스(Cyprus, 또는 사이프러스) 섬 하나를 두고 싸우는 상호 적대국이라고 한다. 국가 입장에선 긴장감 감도는 적국이지만 그들은 캠프 기간동안 둘도 없는 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해, 문화와 역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친구들 또한 자기 나라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들을 보며, 그리고 일본인 학생 노부(Nobu)와 친구가 되면서, 다른 나라에 대한 많은 오해를 풀 수 있었고, 잘못된 이미지도 바꿀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평화의 출발점은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작은 상념을 갖게 했다.

내가 핀란드 캠프 기간에 만났던 친구들, 그 후 러시아에서 온 가족, 내내 함께 있었던 아일랜드인, 에스토니아 학생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나라를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서로 국적은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이 가슴 한 구석에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어 핀란드의 푸른 숲과 호수를 더욱 못 잊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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