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 여자 아직도 격포에 있을까.
채석강 입구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그 여자.
곰소까지만 가자던 발길을 재촉해 나는 다시 모항 지나 격포로 갑니다.

처음 격포를 찾았던 때로부터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재작년에 격포를 다시 찾았을 때는 그 여자, 만나지 못했지요.

오륙년 전쯤, 그 여자, 포장마차 그만두고 엿장사 하더라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격포 또한 선거철 어느 관광지와 다름없이 단체 관광객들로 떠들썩합니다.
채석강 입구에 들어서니 엿 좌판을 벌려놓은 손수레가 보입니다.
아, 있었구나.

하지만 송대관의 네박자 노랫가락 흘러나오는 손수레의 주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갔을까.
한참을 그렇게 두리번거리다 돌아서려는데, 저 앞 커피 파는 포장 마차에서 한 여자가 뛰어옵니다.
"주인 여기 있어요. 기다려."

그 여자가 맞는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십 여년 전에 딱 한 번을 본 것뿐이니 그렇기도 하겠지요.

"이에 안 들러붙어, 맛있어 먹어봐."
여자는 대뜸 엿 조각 하나를 밀가루에 묻혀 건네줍니다.

말투며, 선하게 웃는 눈매, 고운 얼굴, 그 여자가 맞습니다.
아주머니 저 몰라보겠어요.
"누구시더라?"
옛날에 이 옆에서 포장마차 하셨죠.
그때 함께 술도 마시고, 술 마시다 아주머니가 울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 맞다. 기억난다. 자, 얼른 엿 한 번 먹어봐."
관광객들이 엿 수레 앞을 지나갑니다.
"언니야, 엿 먹고 가. 엿이 섭섭해 해."

여자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주머니, 저 기억 못하면서 기억하는 척 하시는 거죠.
여자가 멋쩍게 웃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내가 어떻게 다 기억해."

아저씨는 새만금 공사장에 다닌다고 했지요.
어느 항구 도시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고 했지요.
타향에 들어와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포장마차도 텃세가 심해 못해 먹겠다고.
그러다 울음을 터뜨렸지요.

여자의 표정이 우울해집니다.

울음을 그치고 다시 한참을 이야기했지요.
아저씨가 술만 마시면 때린다고.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남자손님들이 주는 술 한잔씩 받아 마신 게
무슨 잘못이라고 아저씨가 의심한다고 그랬지요.

여자의 눈이 그렁그렁해집니다.
여자는 기억을 되찾은 듯합니다.

재작년에 왔을 때는 안 계시던데.
"고향에 가 있었어요."

채석강을 둘러보고 나오는지 한 떼의 관광객들이 몰려옵니다.
"언니야, 오빠야, 이리 온나. 엿먹고 가거라. 안 그라면 야들이 슬퍼한다."

"이거 얼마야?"
무리에 섞인 젊은 남자 하나가 좌판 앞에 멈춰서며 반 토막 말을 내뱉습니다.
"오빠야 이거 먹어봐."
여자는 엿 한 봉지 팔기 위해 밀가루에 묻힌 엿 조각 하나를 남자에게 건네며 곰살맞게 굽니다.

몇몇 사람들이 엿을 사가고, 다시 좌판 앞에는 나만 남았습니다.
엿은 잘 팔리나요.
"그냥 밥은 먹고 살 만해요."

왜 포장마차는 안 하세요.
"싸우기 싫어서 그만뒀어."

이곳도 옛날에 다들 어로를 하고 농사를 지을 때는 가난한 이웃들 모두가 형제였겠지요.
서로 돕지 않으면 어로도 농사도 가능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관광지로 개발되면서부터 이웃들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게 됐겠지요.

관광객들이 흘리고 가는 푼돈 몇 푼 줍기 위해 포장마차를 하고, 커피를 팔고, 엿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면서 가난한 이웃들끼리도 서로 등을 돌리게 됐겠지요.
형제간에도 경쟁자가 되고, 적이 됐겠지요.

아저씨도 잘 계시죠. 아직도 새만금 공사장 다니세요.
여자는 말이 없습니다.
"남편, 얘기하면 내가 가슴이 아픈디."
혹시, 돌아가셨어요.
여자는 고개를 젓습니다.

"애들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참고 살라고 했는디, 다른 것은 다 견디겠는디, 때리는 것은 더 못 참겠대."
그러셨군요.
"일찍 시집 와서 이 십 년을 같이 살았으니 왜 정이 없겠어."

손님이 뜸합니다.
여자는 커피 한잔을 사겠다며 내 등을 떠밀어 옆의 포장마차로 갑니다.
저는 커피 안 마셔요. 손님 오면 어쩔려고요.
"그래도 정이 그런 게 아닌 게."

나는 여자가 건네준 꿀차 잔을 들고 여자를 찬찬히 봅니다.
고운 자태는 여전하지만 너무 일찍 늙어버린 여자가 쓸쓸합니다.
여자는 이제 겨우 사십대 초반.
십 년 동안 여자는 참으로 굴곡진 세월을 건너 왔습니다.
인간에게 운명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혼한 뒤 여자는 고향으로 가 잠시 살아보기도 했지만 이내 격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고향이라고 반겨줄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격포에 남은 두 아들도 그리웠겠지요.
머리채 잡고 싸우던 옛사람들이 그리웠겠지요.
격포항, 푸른 바다가 그리웠겠지요.

커피 포장마차 앞에 채석강 절벽이 솟아 있습니다.
모진 풍상에 깍이고 깍여 채석강은 저토록 빼어난 풍경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람도 고된 풍상을 오래 견디고 나면 저렇듯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걸까요.

엿 좌판 앞에서 엿을 사려는지 관광객 몇이 두리번거립니다.
커피를 마시던 여자가 얼른 일어나 뛰어갑니다.
"언니야, 기다려라. 안 사고 그냥 가면 갸들이 섭해 한다."
여자의 뒷모습이 하염없습니다.
저무는 격포항, 나도 하염없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