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산에서 오신 세분 수녀님과 차를 마십니다.
봄 햇쑥을 뜯어다 덖어서 만든 쑥 차를 다렸습니다.

수녀님들은 젊은 사람이 섬에 사는 것이 신기한지 궁금증을 참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웃기만 합니다.

내가 숨어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나는 몸을 숨긴 적도, 오만하게 마음을 낮춘 적도 없는데
어느새 은자연하는 속물이 되고 만 것일까.

휴가를 받아 보길도로 건너와 이틀을 머물고 이제 수녀님들은 또 다른 여행지로 가야 합니다.
수녀님들 계시는 내내 날이 흐리고 비가 왔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개고 햇빛이 나, 수녀님들을 아쉽게 만듭니다.

차를 마시던 가타리나 수녀님이 갑자기 노래를 듣고 싶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노래요.
세 분 수녀님이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합니다.
좋지요, 그런데 무슨 노래를 불러주실 건가요, 수녀님.

수녀님들은 차를 대접받은 보답으로 가타리나 수녀님이 작곡하신 노래를 불러주시겠답니다.

뜻하지 않게 차 공양 올리다 음성공양 받게 생겼습니다.
가타리나 수녀님과 데레사 수녀님, 말셀라 수녀님, 세 분 수녀님이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합니다.
말셀라 수녀님은 노래하다 더러 말이 세더라도 이해해 달라며 귀엽게 웃습니다.

"세상의 이웃들이여
진실을 말할 수 없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하늘엔 그 님이 계시고
땅 위엔 풀꽃이 설자리 있다면
그릿 개울 강가에 숨어서
갈대 숲 사이로 하늘만 보며
숨어 피는 꽃이 되어 살아 갈래요

세상의 이웃들이여
참사랑 만날 수 없어도
걱정하지 말아요
내 맘에 그 님이 계시고
님 위해 한 생을 살 용기 있다면
그릿 개울 강가에 숨어서
갈대 숲 사이로 하늘만 보며
숨어 피는 꽃이 되어 살아 갈래요
(탁 엠마 작사, 김 가타리나 수녀 작곡, '그릿 개울')

수녀님들의 음색은 맑아도 노래가 어찌나 처연한지 마음이 다 아릿해 집니다.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아 예언자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라는데 나에게는 노래가 한 종교의 성가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박해를 피해 강호에 숨어살며 때를 기다리던 선지자들의 삶이란 나라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 마련이지요.

가사가 너무 순결합니다. 어느 수녀님이 지으신 건가요.
나는 궁금해 묻는데 수녀님들은 머뭇거립니다.
말씀하시기 난처하신가.

주저하시더니 이내 말문을 엽니다.
"지금은 없는 분이에요. "
없는 분, 그는 이미 고인이 된 것일까.
"오래 됐어요. 벌써 한 십 년은 됐는데. 그때 환속했어요."

각기 사는 세계가 다르면 살아 있어도 산 사람이 아닌 것을.
삶과 죽음의 세계 또한 그러하리라.
수녀님들 눈가에서 아련한 그리움이 배어 나옵니다.

괜히 물어 봤구나.
나는 얼른 한 번 더 불러주시길 청합니다.
수녀님들은 쾌히 승낙하시고, 한번, 또 한번, 같은 노래를 내리 세 번이나 불러줍니다.

그러고도 수녀님들은 다른 노래를 몇 곡 더 불러줍니다.
나는 눈을 감고 노래에 깊이 빠져듭니다.

벌서 노래가 끝났는가.
눈을 떴으나 아득합니다.
수녀님들도 아직 못다 부른 노래가 있는지, 아쉽게 일어섭니다.

몇 달 전에는 어떤 비구니 스님에게 차 공양을 올렸다가 그 낭랑한 청으로 찬불가 공양을 받았는데, 오늘은 난데없이 수녀님들의 성가 공양을 받았습니다.
나는 웬 복이 이리도 많은가.

아니지, 지은 공덕도 없이 공양만 받았으니 갚아야 할 빚만 자꾸
쌓여가는 것일 테지.
햇빛 속으로, 수녀님들이 아주 사라져 버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