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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다/영글다'에서 '열매'로

요즘은 실(實)이라고 하면 누구나 '열매 실'이라고 새깁니다. 그러나 원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 이래의 한자학습서들을 보면 '열매'라는 새김을 가졌던 한자는 따로 있었지요.

1527년에 편찬된 <훈몽자회>에는 실(實)자가 수록돼 있지 않습니다만 '열매'라는 뜻의 '여름'을 새김으로 가진 말이 두 개 나옵니다. '나무의 열매'라는 뜻의 과(菓)자와 '풀의 열매'라는 뜻의 라(초두밑(艸) 아래에 참외 과(瓜)자 두 개)자가 그것입니다.

1575년에 편찬된 <광주 천자문(도쿄대학본)>에는 과(果)자가 '여름 과'라고 풀리어 있는데 이때 '여름'은 '열매'라는 뜻입니다. 한편 이 책에는 실(實)자는 '염믈 실'이라고 돼 있습니다. 오늘날의 '여물다'는 동사이지요.

1576년에 출간된 <신증유합>에도 과(果)는 '여름 과'고, 실(實)은 '여믈 실'로 나옵니다. 한편 1583년간 <석봉 천자문>에는 실(實)자의 새김이 '염갈(아래아) 실'로 조금 다르게 나옵니다. 오늘날의 '영글다'는 형태로 변화된 동사입니다.

이렇게 16세기에는 실(實)자가 '열매'라는 명사로 새겨지기보다는 '여물다' 혹은 '영글다'는 서술어로 새겨졌었습니다. '열매'라는 명사로 쓰인 한자로는 과(果), 과(菓), 라(초두밑(艸) 아래에 참외 과(瓜)자 두 개) 등이 있었지요.

그런 새김 관행은 17세기와 18세기에도 계속됐습니다. 17세기 판본인 두 <유합>이 그런 새김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유합(칠장사판, 1664년)>은 과(菓)를 '여름 과'로 풀었고, 실(實)은 '염그 실'로 풀었습니다. <천자문(칠장사판, 1664년)>도 실(實)은 '염글 살(아래아),' 과(果)는 '여람(아래아) 과'로 되어 있습니다. <유합(영장사판, 1700년)>에서는 과(菓)를 '여람(아래아) 과'로, 실(實)을 '여믈 실'로 풀었습니다. 18세기 판본인 <천자문(송광사판, 1730년)>에서도 실(實)은 '염갈(아래아) 실'로 새겼고, 과(果)는 '여름 과'로 새겼습니다.

19세기 들어서는 실(實)자의 새김이 점차 '열매'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주해천자문 (중간본, 1804년)>과 19세기의 <이무실 천자문(중간본, 1830년)>, 20세기의 <속수한문훈몽(국립중앙도서관본)> 등에서 모두 실(實)을 '열매 실'로 풀었고, 그 이후의 대부분의 자전은 실(實)의 첫 번째 뜻으로 '열매'를 제시했습니다.

18세기는 물론 19세기에도 '열매'라는 말과 '여름'이라는 말은 나란히 쓰였습니다. <이무실본 천자문(1830년)>에서는 실(實)을 '열매 실'로, 과(果)를 '여름 과'로 풀었기 때문입니다. '여름'과 '열매'는 차이가 있는 낱말일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같은 뜻을 가리키는 동의어로 보아도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아마도 이 시기는 '여름'이 '열매'로 바뀌어 가는 교체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은 '여름'이라는 말은 죽고 '열매'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름'은 풀의 열매와 나무의 열매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를 대체한 '열매'는 주로 나무의 열매만 가리키게 된 것이 특이합니다. 낱말이 교체되면서 어의가 축소된 것이지요. 덕분에 그 이후로는 풀의 열매를 가리키는 말은 '낟'이라는 고유어나 '곡식(穀食)'이라는 한자어가 주로 쓰였던 것 같습니다.


왜 '열매'인가?

실(實)자는 18세기까지 '여물다/영글다'로 새겨졌으나 19세기 들어서는 그 새김이 '열매'로 아주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진실'이라든가 '실상'이라는 파생적인 새김까지 덧붙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명사와 동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한자의 특성상 이런 변이는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여물다/영글다'는 '열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리킨다면, '열매'는 '여물다/영글다'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름/열매'이든 '여물다/영글다'이든 모두 같은 의미군에 속한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실(實)자에 '여물다/열매'의 의미가 붙게 된 것일까요? 앞에서 본대로 실(實)의 어원적 의미는 일차적으로 '집에 쌓아둔 돈꿰미'를 가리키고, 이를 좀 더 넓게 해석해서 '벼리에 따라 관리되는 가용한 자원'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어원적 해석이 '여물다/열매'라는 뜻과 연관되었던 데에는 무슨 뜻이 있는 게 아니었을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열매'나 혹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여물다'는 실(實)의 어원적 의미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과정이요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일이나 곡식이 여무는 과정은 집안에 자원을 들여와 쌓고 정리하는 과정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일대일 대응관계를 자세히 한번 보겠습니다.

실(實)의 어원적 의미는 세 가지 의미군으로 구성됐습니다. '집'이라는 영역과 '돈'이라는 내용물과 '끈으로 꿰였다'는 처리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열매에는 이 세 가지가 그대로 발견됩니다. 열매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영역성'이 있습니다. 한 개의 과일, 한 개의 낟알 마다 그것의 외양은 그 독립적인 경계를 유지합니다. 그것은 사과처럼 다소 얇은 껍질로 외부와 구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호두처럼 단단한 껍질로 내부를 지키기도 합니다. 어떤 종류이든 모든 열매는 '껍질'을 갖고 있고, 그것이 바로 실(實)의 한 구성요소인 '지붕'에 대응한다고 보겠습니다.

또 모든 열매의 내부에는 '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實)의 어원적 의미에 나타난 돈(貝)에 해당한다고 보겠습니다. 열매의 '살'이나 실(實)의 '돈'은 모두 유용하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열매는 '씨'를 갖고 있습니다. '씨'는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열매의 '핵심(核心)'입니다. 그것은 모든 열매의 '벼리'입니다. 사실 '살'과 '껍질'은 바로 그 '씨'를 보호하거나 양육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게 바로 열매의 '살'과 '껍질'이 존재하는 일차적인 이유입니다. 실(實)의 어원적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돈(貝)은 유용한 것이고 집(家)은 그것을 보호하지만, 돈과 집은 모두 그것을 꿴 '끈' 즉 '벼리'를 유지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원적 의미의 실(實)과 '열매'로서의 실(實)은 정확하게 대응관계를 형성합니다. '껍질'은 '집'에, '살'은 '돈'에, 그리고 '씨'는 '끈'에 대응합니다. 그런 일대일 대응관계가 고대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관찰되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실(實)자는 과정으로서의 '여물다' 혹은 그 결과로서의 '열매'로 새겨졌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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