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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전체의 줄거리

아버지의 좌천으로 서울에서 시골 초등 학교로 전학 온 "나(한병태)"는 담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아이들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엄석대'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엄석대'에게 대항하던 '나'도 결국은 교묘한 압력에 굴복하여 그의 휘하로 들어가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민주적 의식을 가진 새 담임의 개혁 의지로 엄석대 체제는 몰락한다. 시간이 흘러 사회인이 된 '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며 '엄석대'에 대한 일종의 향수까지 느끼고, 그러던 중 휴가길에서 형사에게 붙들려 가는 초라한 모습의 '엄석대'를 보게 된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권력의 형성과 몰락과정을 초등 학교 교실이라는 축소되고 집약된 공간을 통해 조명해 본 것으로 권력의 무상함과 거기에 기생하는 변절적 순응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엄석대라는 독재자, 박원화는 독재에 순응하는 대부분의 인간 군상, 엄석대에 저항하다가 결국 굴복하는 '나'는 변절적 순응주의자를 상징한다. 이는 자유당 정권하의 정치적 현실을 우의(寓意: allegory)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설 장르가 언제부터 나타났는가'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라고들 한다.(필자 주- 'I, 와트의『소설의 발생』'을 참고 바람) 소설의 발생을 근대라는 시대성과 결부지어 해석해 보려한 루까치는 "소설은 타락한 시대에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문제적 주인공이 결국은 파멸되고 마는 구조를 지닌 근대 이후의 서사장르이다"라 규정한 바 있다.

작가의식의 산물인 개별적인 작품들을 살펴보면, 근대이전의 서사체인 노벨(novel)의 경우 현실에서 이상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풍토였기에 해피엔딩으로 종결되는 반면에, 근대이후의 서사체인 픽션(fiction)의 경우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조화될 수 없는 단절이 있어 작품은 항상 비극적으로 종결된다고 하겠다.

물론 픽션의 작품들에서도 해피엔딩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멜로물의 형식이 아니면 역설의 방식을 취한 것으로 작가의 의도적 장치의 결과이다.

위 소설의 경우, 작가는 러비어탄과 같은 외적 세계에 직면한 작중 주인공 '나'를 굴복시켜 그 문제적 주인공을 결국은 파멸된 변절적 순응주의자로 창조하여 세계의 타락과 인간의 허무와 절망을 부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작가의 선택의 문제다.

소설이란 장르를 문예사조와 관련지어 본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사회 현실의 객관적인 반영과 그 비판'을 추구하는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에 바탕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소설장르가 현실과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음을 뜻한다.

일제치하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의 경우, 채만식이나 김정한의 작품세계에서 보듯 작중 주인공들은 극복될 수 없는 부정적 상황에 직면하여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타나토프시스(thanatopsis)의 비극적 세계관을 보였다. 작가는 작중 주인공을 세계의 부정성에 항거하며 죽음으로써 그의 지향을 실천하는 순진성의 인물로 창조한 셈이다. 아마도 이는 시대의 정신이나 풍토를 작중에 반영하려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리라.

위 소설의 경우,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태를 반영하려는 의도의 결과인지 작중 주인공을 부정적인 시대상에 영합하는 인간상으로 창조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연보('삼성출판사의『한국현대문학전집』1990'을 참고 바람)를 참고로 하면 어쩌면 자전적인 사소설적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중의 문제적인 주인공을 타락한 존재의 면모로 창조한 작가의식의 선택 행위에는 아마도 한 인간으로서 취택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세계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이문열은 1970년에 '사람의 아들'을 발표하여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1980년간에 '젊은 날의 초상'과 '황제를 위하여'등을 발표했으며, 1982년 중편 '금시조(金翅鳥)'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아가(雅歌)' 그리고 '선택'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한 그는 우리 대중들에게는 소설가로보다는 오히려 논쟁가로 더 잘 인식되어 있다.

물론 작가로서 또 문화교양시민으로 '말'하며 살아가는 그가 '말'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지만 그의 '말'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어 토와 꼬리를 달며 비판하는 수많은 사람들- 소설가 황석영, 비평가 이명원 이현식 권성우 이우용 윤지관, 문학자 이동하 백낙청 김윤식 등등-이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문학적 그리고 인간적 실천에 적지 않은 논란거리를 지니고 있으리라 여겨진다.(이에 대한 자료 정리의 비판적 측면은 '강준만, 『이문열-문화특권주의와 지식폭력』인물과사상사, 2001'에 도움 입은 바 크다- 필자)

특히 2001년에만도 그와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조선, 01.07.02)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동아, 01.07.09)등을 기고하여 지식인 사회를 혼돈의 상태로 몰고 갔으며 급기야는 국회의원 추미애와의 '곡학아세 논쟁'(문화, 01.07.04)을 통해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단견을 보임으로써 그의 의식 기반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 글들에 의해 수많은 논쟁이 펼쳐졌고 이 과정을 통해 그의 현실의식과 그것에 바탕한 작가의식의 산물이라 할 작품들의 실체적 의미가 해부될 수 있게 되었다. '중용(中庸)'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삶을 지배하여 항상 보수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 문화적 정서에 젖어 진보를 '젊지않게' 여기지 않는 풍토 속에서 새로운 역사의 실현을 정책적으로 실천했던 저간에 이러한 진보의 바람을 완강히 거부하고 기득권의 고수를 주장하는 세력은 있었다.

이들 중 대중적 영향력이 큰 것은 언론임은 당연하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중심이 되어 민중 중심의 역사를 펼치려는 민중의 의지를 비웃듯 이들은 보수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가로막았다. 오늘날과 같은 타락의 대중문화의 시대에 '언론은 민중의 목탁이다'라 믿는 어리석은 자들은 아마도 없으리라.

오늘날 기자가 기자정신에 입각하여 언론활동을 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탓이다. 일제하 손기정 선수가 백림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동아일보의 식자공이 손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 사진을 지워버린 의기를, 70년대의 유신시절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를 열망하고 투쟁하던 송건호의 '언론동아투위'와 이영희의 '언론조선투위'의 의기를, 그리고 오늘도 돌아 앉아 엄지에 침을 발라 빳빳한 돈을 세는 모습을 비교해 보자. 이러한 보수의 대변인격이 되어 진보를 비판한 이문열은 무엇보다도 소시민의 근성을 탈각하지 못한 중산층 이상의 보수성향의 지식문화교양인들과 지향과 실천의 의식과 같다.

이 점은 그의 소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의 주인공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하다. 그 주인공의 행위는 곧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식문화교양인들의 의식과 행위 선택에 해당하리라.

문제는 바로 이문열의 선택에 있다. 작중 주인공이 부정과 타락에 항거, 비상하다가 결국은 굴복, 추락하는 것은 우의로서 그 비판의 작가정신을 드러낸 것이지만 비판의 칼날을 더욱 날카로이 갈 것인지, 아니면 러비어탄같은 현대의 부정성에 굴복하여 자조와 모멸에의 안주란 단맛을 즐길 것인지 하는 것은 바로 이문열 자신의 선택에 있다.

위 소설의 작중 주인공이 작자인 이문열 자신을 그리고 그를 애독하는 보수의 지식문화교양인들로만 여겨진다. 그런데 최근 그의 '말'들은 자조와 모멸의 활자로만 다가들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꿈과 희망을 앗아가는 것만 같아 더욱더 슬프다.

끝으로 그의 쇄신분골(碎身粉骨)과 절차탁마(切磋琢磨)와 대기만성(大器晩成)을 빈다.

덧붙이는 글 |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고 합니다. 사이버 시대라 하여 어찌 가벼운, 그래서 감각적인 글, 즉 미셀러니만 있을 수 있겠읍니까? 

무거워 사유적인 글, 즉 에세이를 독서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이버 화면의 글을 인쇄하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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