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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염소 우유 먹이러 세연정으로 갑니다.
먼발치에서 내가 보이면 반갑게 뛰어오던 막내가 오늘은 마중 나오지 않습니다.
어쩐 일이지, 젖을 얻어먹었나.
어미는 내가 오건 말건 부지런히 풀을 뜯고, 튼튼한 두 녀석은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 장난치고 놉니다.
녀석들 나무에 오르는 실력이 다람쥐나 원숭이 못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막내 녀석은 어디로 갔지.
나는 염소들 곁으로 다가가며 막내를 부릅니다.
막내야, 젖 먹자.
막내는 대답이 없습니다.
어딜 갔나.

막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막내야, 막내야,
어미는 무심히 그저 풀만 뜯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막내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 그런데 저기에 막내가 있습니다.
왜 누워 있지.

어미에 가려 보이지 않던 막내가, 어미가 풀 뜯는 반대편 풀밭에 누워있습니다.
막내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습니다.
아침까지 멀쩡했는데, 아기 염소 막내는 이미 죽어 있습니다.
무슨 일로 그리도 급히 간 것일까.

눈을 뜨고 죽은 막내의 얼굴이 편안해 보입니다.
우유를 주러 올 때마다 너무도 살갑게 구는 막내를 보며 이렇게 정붙이면 어떻게 하지.
이 정을 어떻게 떼지, 걱정했었는데.
어제는 막내 듣는데서 그 말을 했었는데, 막내가 그 소리를 알아들었던 것일까.

나는 외상 하나 없이 깨끗한 막내의 사체를 수습합니다.
어미는 제 새끼가 죽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풀만 뜯습니다.
다른 새끼들은 뛰놀고, 장난치고, 신이 났습니다.

혈육의 주검을 옆에 두고도 생사에 저토록 무심할 수 있다니.
염소는 마치 생사에 걸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눈앞이 아찔하여 잠시 비틀거립니다.
염소에게는 생사의 문제가 저리도 간단한 것이었던가.

나는 이제 담담하게 막내의 시신을 땅에 묻습니다.
목에 칼을 받지 않고, 가마솥에 통째로 삶아지는 운명을 피해 간 막내의 죽음은 얼마나 평화로운 지요.
막내 무덤 위로 자애로운 봄 햇살이 마구 쏟아져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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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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