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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이 넘으신 현역선수들

오늘은 면민의 날 체육대회. 아침 일찍 마을회관 앞으로 나갔다. 동네 주민들이 벌써 여럿이 나와 있었다. "우리 동네는 선수를 나이로 뽑았군, 나이로 뽑았어." 내가 한마디 하자 70이 넘으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서울 가 있는 자식 놈 불러 내릴까", "애 하나 더 낳아 버릴까" 말들이 많다.

나더러 애 더 낳으랄까봐 얼른 화제를 딴데로 돌렸다. "전 생원 자네는 후보선수여 후보선수." 나는 나이가 어려서 주전 멤버가 될 수 없단다. 나도 이제 젊다는 얘기를 들어야 한시름 놓이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기서는 도리어 어리다는 취급을 당하니 내 인생이 희망스럽기까지 하다.

오늘은 특별히 술 먹는 대회도 할 거라고 말했더니 쌍둥이 할아버지는 농담인 줄 알면서도 기대가 되는지 몇 번씩이나 정말이냐고 캐묻는다. 제일 자신 있는 종목인가 보다. 이장님이 늦자 저런 굼벵이같은 자식을 이장시켰더니 동네가 요모양이라고 막말을 막 해대더니 막상 이장이 나타나자 "이장 수고 많구마. 소 젖 짜느라고 마누라 젖 만질 틈은 없제? 농사일도 바쁜데 동네일 보느라고 욕보네"하면서 추켜준다.

이장님 지프차가 앞장을 서고 돼지막사 오 사장이 트럭을 몰고 그 뒤로 내 차가 따라붙었다. 트럭에 실린 대형버너랑 솥단지 등 주방도구들이 우리 일행을 피난민처럼 보이게도 하고 봄철 행락객처럼 보이게도 했다. 응원가라도 부르면서 창문을 두드려대고 싶었지만 참았다. 40대는 아니더라도 50대 주민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바가지 요금과 잡상인은 축제의 꽃

요즘은 웬만한 시골마다 주요한 연례행사가 있다. 바로 면민의 날 행사다. 노래자랑이랑 체육대회랑 국악공연 등이 주종을 이룬다는 점에서 지역마다 다들 고만고만하지만 올해 우리 면은 윷놀이에 고리걸기, 바구니 터뜨리기, 단체 줄넘기 등등 제법 신경을 써서 행사계획을 짰다. 물론 내가 짠 게 아니고 면직원이랑 연합회니 협의회니 하는 여러 단체들의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짠 것이다.

지역행사가 고만고만 하기로는 도로를 점령한 채 바가지 요금을 덮어 씌우는 잡상인이 으뜸이다. 행사의 뒷전에서 술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촌로들의 모습도 그렇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또 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행정관료는 또 관료대로 명분과 실리를 저울질하며 얼굴 내밀기 악수 청하기에 바쁜 모습들이다. 지역 유지랍시고 설치는 토박이 본토 사람들의 신바람도 빼놓을수 없다. 그렇다. 의례적인 연례행사를 비로소 축제답게 만들어내는 요소들이다.

축사와 격려사는 왜 이리도 많은지

이 지역 국회의원이 높은 단상에서 써 가지고 온 축사를 읽어내렸다. 군수도 올라갔다. 우체국장인 군의원도 올라갔고 면장님도 한말씀하셨다. 말씀 하시는 분 따로 제 맘대로 휘젓고 다니는 사람 따로 행사장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놀자판이었다. 우리 고장의 명물 철쭉꽃이 면사무소랑 초등학교 앞 도로를 꽃동산으로 만들어놨다. 송광사 길목 2킬로미터의 벚꽃 축제도 한몫한다. 서커스까지 들어와서 요란하다. 얼김에 면민의 날이 잡힌 건지 면민의 날에 맞춰 조성된 건지 알 바 아니다.

운동장을 빙빙 돌아가며 쳐진 마을 천막들에는 질펀한 술판이 먼저 벌어졌고 노인네가 많은 시골 사정에 맞게 만들어진 각종 노인 위주의 운동경기들은 헛발질과 질펀한 입담들로 선수나 구경꾼이나 웃음바다를 이룬다. 얇은 수건 하나를 상품으로 목에 걸고는 자랑이 만만찮다.

"동네 돌아가서 우리집 할마씨한테 나 한잔도 안 마셨다고 하라고 그랬찌? 잘 기억하고 있으라고! 자 한잔만 더."
"창대 할부지 인자 고만!! 동네 천막마다 돌면서 소주 씨를 말려요 씨를 말려."
"오늘 내가 김치냉장고 타면 소주 한 박스하고 바꿔다 줄테니 걱정 붙들어 매라니께. 어서 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이럴까 싶을 정도다. 엄살과 생떼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오후 뒤늦게 있을 추첨 경품권은 꼬깃꼬깃 땟국물이 흐르는 갈퀴같은 손아귀에 거머쥐고들 있다.

나도 운동장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얻어 마신 술로 제법 취기가 올랐다. 벌건 대낮인데도 분위기에 편성도 하고 술기운도 빌려 먼저 술잔을 건네는 젊은 아주머니들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서였다. 초등학교 학부모 회의 때나 농협 조합원 행사 때 눈이 익은 아주머니들이다.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불러세워서 덥석 손목을 끌면 장사라도 못 이긴다. 이 부분에서 분명히 할 것이 있다. '눈이 맞은'이 아니라 '눈이 익은'이라는 사실을.

이러다보니 일찌감치 행사장을 빠져나가 어질러 놓은 밭일이나 하려던 내 오늘 일정이 삐거덕댄다. 망서릴 여유가 없었다. 신속히 일정조정을 했다. 막판까지 여기서 개기기로.

살아 있는 기자정신 - 긴급 인터뷰 시도

여유로워진 나는 기자정신을 발휘하여 작년 중반에 부임한 40대 후반의 면장을 찾아갔다. 오마이뉴스 기자라고 솔직히 내 신분을 밝힌 다음 예산문제니 면민 사전조직화 문제니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경품 찬조가 순조로웠는지 등 날카로운 질문과 황당한 질문을 적절히 섞어가며 인터뷰를 해나갔다.

작년 말 우리마을 노인회관 준공식 때는 인사를 나누면서도 왠 젊은 사람이 시골에서 땅이나 파고 있냐는 눈치더니만 오마이뉴스 기자라고 하니까 자리까지 권하는 것이었다. 역시 떠오르는 대안매체 오마이뉴스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인터뷰가 다 끝나고 일어서는데 면장님이 내게 청탁을 하나 해오셨다. 신문 나오면 몇 부 면장실에도 좀 갖다 달라는 부탁이었다. 오 맙소사.

노래자랑과 춤자랑

어느새 노래자랑 시간이 되었다. KBS 지방방송국 무슨 아나운서라는 젊은 남자가 사회를 보는데 성인 나이트클럽 수준의 육담을 엮어낼 때마다 사람들은 그렇게 우스운가 보다. 특별 출연한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어린 여학생 명창이 판소리를 감았다가 풀었다가 젖혔다가 쭈욱 내뻗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요 너머 문화마을에서 교습장을 만들어 놓고 엄마같은 사람들을 문하생으로 거느리고 있다고 옆동네 이장이 귀띔해준다.

노래 부를 사람이 나오기도 전에 마을 주민들은 연단 앞에 몰려나가 춤을 추고 괴성을 지르고 난리다. 나는 경품 추첨권을 기정이 할머니에게 맡기고 행사장을 나오려는데 신교리에 사는 유정 씨를 만났다. 새로 뽑은 더블캡 4륜구동형 트럭을 타고 있었다. 귀농학교 1기 나랑 동기다. 어쩔 것인가. 한 꼬뿌 제낄 수밖엔.

대형 스피커에선 천 몇백 몇번 번호 없으면 그냥 넘어간다고 되풀이하여 방송한다. 추첨을 다시 하는 모양인데 놓친 물고기가 커 보이고 남의 손의 떡이 맛있어 보인다고 아무래도 내 번호 같다. 김치냉장고는 내 인연이 아닌가 보다. 당첨만 되면 독거노인이나 경로당에 기증하여 텔레비전에 얼굴 한 번 나올려고 했는데 아쉽다 아쉬워.

저녁에는 마을회관에서 뒷풀이가 열렸다. 면민의 날에 세탁공장에 출근하여 빨래만 해던 동네 할머니들까지 다 모였다. 남겨온 닭죽을 다시 데웠고 먼지 앉은 노래방 기기에 전원을 넣었다. 어린(?) 나는 여기서도 심부름만 하다 돌아왔다. 심부름만 한들 어떠리 일년 열 두 달 면민의 날만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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