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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훈 기자의 "오마이뉴스 특정인사 편들기 안된다"와 관련기사들을 읽었다. 본 기자는 서강훈 기자의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서강훈 기자가 기사 말미에 밝혔듯이 그 스스로가 "특정후보"의 지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오마이뉴스에 그러한 정치적 편향성이 보인다는 솔직한 지적은 그간 오마이 뉴스가 견지해온 정치적 편향성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늦은 감이 있을 정도이다.

오마이 뉴스를 옹호하는 관련기사들 역시 대체로 "오마이 뉴스의 정치적 편향성"은 인정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그런 엄격한 공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바람이다. 아무런 가치 판단도 없는 정치 기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고태진 기자는 "왜곡이나 과장이 아니라면 '편들기'와 '편파성'도 오히려 필요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이창근 기자는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주로 읽고 쓰는 사람들이 비교적 진보적이고 젊은 세대인 이상 특정 후보의 기사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독자 성향론"까지 성급히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 왜곡까지 포함한 - "정치적 편향성"으로 비판받는 조중동은 보수적이고 늙은 세대들이 독자층이라 그렇다는 이야기인가?)

오마이뉴스에 대한 이들의 애정어린 변론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오마이뉴스에 애정을 갖고 있는 본 기자로서는 "인간 존재"나 "공정한(?) 편파성"에 대한 그들의 "심오하거나 다소 적나라한 속내"에 그다지 동의할 수 없다.

아울러 이들 세 기자의 논지는 얼마전 오마이뉴스가 공개적으로 찬반여론을 물었던 "오마이뉴스가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것이냐"는 또 다른 "뜨거운 감자"의 "찬"쪽 논거가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로서 그들의 논지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이제 공론의 장에 올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논지가 서로 크게 엇나가지 않고 중복되기에 고태진 기자의 논지를 집어보면서 김종호 기자와 이창근 기자의 논지를 간접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자.

고태진 기자는 "언론에 있어서 객관성이란 잣대가 획일적인 기사량 분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첫번째 작은 글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뒷문장에서 "객관성이란 잣대는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객관성"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매일, 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인터넷 언론"에서는 "객관성"이란 잣대가 "기사량 분배"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오마이 뉴스의 틀에서 top으로 올라가거나 잉걸로 올라가는 기사의 차이는 엄정하다. 그것은 일반신문의 일면이나 사설, 또는 각 지면의 헤드라인의 비중과 같다. 오마이 뉴스의 "정치적 편향성"의 "객관성"은 먼저 여기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고태진 기자가 "객관성의 잣대"로 삼은 "독자의 알 권리 충족"은 매우 모호한 "잣대"다. 고태진 기자는 오마이뉴스의 "독자"는 "특정 후보나 특정 정당의 지지자"로 넘쳐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언론"의 "정도"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또 고태진 기자는 두 번째 작은 글에서는 "오마이뉴스도 없는 기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라며 "기사의 편중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서강훈 기자도 적절히 지적했듯이 오마이 뉴스의 자체기사와 각종 기획들이 이러한 "편중성"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걸까.

세번째 작은 글에서 고태진 기자는 (위에서 전술하였듯이) "왜곡이나 과장이 아니라면 '편들기'나 '편파성'도 필요하다"고까지 나아간다. 그 뒷문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길이라면 과감하게 언론이 나서서 편들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의 "속내"는 그렇다치더라도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나아가야할 바람직한 길"같은 추상적인 어구가 어떻게 "오마이뉴스의 정치적 편향성"과 곧바로 합치되는 지 모르겠다. 각자가 바라보는 각자의 방식이 존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폄하와 "톨레랑스 부족"이 바로 이 사회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수많은 가치판단의 상대성은 굳이 예로 들 것도 없지만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한총련"에 대한 각계의 상이한 시각은 소위 "지식인 사회"에서도 그 평가가 엇갈리고 있으며 "현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비판과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비판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고태진 기자가 슬쩍 같은 선상에 세워놓은 "친일파 문제"와 (노무현 후보의 과거 국회 또는 집회장에서의 정견에 대한) 이인제의 소위 "색깔론"은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볼때 실상 전혀 다른 것일 지도 모른다.

어떻게 "자신"과 "자신이 인정하는 독자"만이 선이자 정의이자 기준이 될 수 있나. 여론조사의 결과가 나쁘면 "국민이 잘 몰라서"이거나 "홍보가 안되서"이고 좋으면 "역시 국민은 현명하다"고 레테르를 붙여온 위정자들의 논리와 이것은 대체 무엇이 다른가.

일각에서 운운하는 "서구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은 많은 수가 정치 팸플릿으로 시작한 그 기원을 부러 무시하는 것일테다. 굳이 "자신의 방식으로 독자를 선도"하고 싶으면 정치적 지향성이 같은 그 정파에 들어가 자신의 힘을 보태면 될 일이지 굳이 "언론"까지 덤으로 거기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 덕분에 더욱더 언론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해야 한다. 이창근 기자는 "객관성이 어려움을 인정하고 객관성보다는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언론은 "객관성이 어려움을 인정하고 객관성을 포기"하는 것이 본령이 아니라 "객관성의 어려움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추구하여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그 본령이다.

"왜곡되지만 않으면"이라는 전제는 "정치적 편들기나 편향성"을 주장할 때 이미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한쪽 손에 CD 1000장을 올려놓고 "그래도 똑바로만 걸으면 된다"고 우기는 것과 매한가지다. 게다가 애매하게 "독자" 핑계대면서 책임을 모두 독자에게 넘기고 언론은 마이웨이를 걷는다면 이건 또다른 형태의 "일상적 파시즘"이다. 주지하다시피 파시스트가 가장 유용하고 편리하게 쓰던 단어가 "여론"과 "대중" 아니었나.

서강훈 기자가 확인했듯이 오마이 뉴스는 "뉴스게릴라들에 의한 건강한 신문임을 자처해왔으며 어떠한 세파에도 시달리지 않는 뚝심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그 "정치적 올바름"이 힘을 얻을 것이다.

"올바른 여론"을 만들고 싶으면 객관적인 자료(기사)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중앙일보가 정치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완성한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의 이념적 편중성"같은 기사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것이 언론이 만드는 올바른 여론의 힘이다. 나는 오마이뉴스가 그 길을 똑바로 걷기를 바란다. 대선이나 여타 선거가 끝나도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독자와 기자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있기를 희망한다. 누구 말대로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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