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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서는 열 마리 남짓 소를 키우고 있었고, 그 중에는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샀던 늙은 암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작두질과 소등을 빗질해주는 것은 중요한 일과였다. 나이 많은 암소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대우를 받았고, 아버지 몰래 동생과 나는 암소의 등에 타고 놀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형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까칠한 혀로 우리의 손과 머리를 핥아주던 주던 늙은 암소는 어느 날 내가 학교를 다녀오는 동안 팔려가고 말았다. 동생은 그 날, 늙은 암소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트럭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80년대 초반으로 기억되는 소값 파동으로 결국 사료값도 갚지 못할 헐값에 우리 집 외양간에 있던 소들은 그렇게 팔려나갔다.

이중섭의 그림을 미술 교과서에서 처음 본 이후로 그는 나에게 '소'의 화가가 되었다. 단지 교과서에서 얻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이중섭은 그렇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각진 근육, 출렁이는 불알,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땅을 박차고 있는 앞발, 왠지 슬픔이 가득한 한 눈을 가진 '흰소'를 그린 그 화가에 대한 애정은 팔려나간 우리 집 소들에 대한 추억과 맞물려 있었다.

그가 그린 '소'에 대해서는 민족의 상징,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교과서적인 감상보다, 나에게는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늙은 암소와 줄줄이 헐값에 팔려나갔던 우리 집 소들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따뜻한 매개체였다. 경험한 것 이상 느낀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찾은 그에 관한 평전은 모두 9종, 어린이용 전기물로 나온 것을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1999년 사간동 현대 갤러리에서 열렸던 그의 특별 회고전 이후에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이중섭 붐'이 일어났을 때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내가 헌책방에서 찾아 읽은 고은 시인의 '이중섭'도 99년에 재출간 된 것을 보면 그 사실을 반증해 준다. 출판계도 책을 팔아야 살아남는 혹독한 시장원리가 적용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지만, 좋은 책이라면 '붐'을 타고 출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위기에 편승에 나온 책들은 내용은 둘째치고 왠지 장사 속이 보여 싫기도 하고, 나도 분위기에 들떠 책을 읽는 것은 아닌가 꺼림칙할 때도 있다.

고은 시인의 이중섭 평전은 1973년에 첫 출간되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77년 여섯 번째 인쇄본이다. 내 나이를 훌쩍 넘어서는 그의 '이중섭'은 '숙명의 비극자(悲劇者)'로 표현되어 있다. "이중섭은 숙명의 비극자이다. 그 비극적 창조자를 작가론으로 형성하려고 할 때 반드시 그의 예술가로서의 크기는 비평 행태를 일단 해체시킨다는 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은 이중섭의 삶의 궤적을 철저하리 만큼 따라가고 있다. 어린 시절을 보낸 평양, 임용련 선생을 만나고 소를 그리기 시작한 오산중학, 동경제국미술학교 유학과 동경전람회의 데뷔, 제주도 생활이후 헤어져 평생을 그리워해야 했던 일본인 아내 남덕과의 만남, 부산 피난민 시절, '게'가 그의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한 제주도 생활, 거제도, 진주, 대구등 그가 살았던 곳을 빠짐없이 자세한 약도까지 넣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결국 이중섭이 술과 고단한 생활로 인해 무연고자로 정신병과 간염으로 1956년 9월 6일 2시 40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고은 시인은 고독한 천재 이중섭의 생애를 담담하지만 철저하게 글로 옮긴 것이다.

"중섭은 천재다. 그러나 종적인 천재다. 그의 횡간에는 아무런 비교 대상도 설정할 필요가 없는 고독한 천재다. 그에게는 창조적 동시대가 없었다. (중략) 중섭은 작가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림을 만들 뿐이다. (중략)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악조건이 된 그의 말년에 탁월한 그림들이 속출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예술가에게는 그의 예술이 남겨져서 누리게 되는 예술적 명예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예술 이상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될, 여느 사람들로서는 해득될 수 없는 비밀"을 알기 위해 읽었던 '이중섭'. 불행을 가슴속으로 저며내며 그려낸 그의 작품은 말과 글로 비평을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은 시인조차 해득될 수 없는 비밀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헐값에 팔려나간 우리 집 소들과 교과서에 실려있던 그의 '흰소'를 생각하며, 먼지 쌓인 그책을 구입(76년 당시 가격은 1200원, 헌책방에서 구입한 가격은 2천원)했지만, 이 책에 담긴 그의 생애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넓고도 깊은 예술혼이 담겨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 고은 지음, 민음사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 - 이중섭의 삶과 예술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예술기행

허나영 지음, arte(아르테)(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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