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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밥. ⓒ김해화
해마다 첫 수업시간이면 저는 아이들 앞에서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먼저하고 수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 말을 아이들 공책 맨 첫 장에 적게 한 뒤에 이렇게 말해줍니다.

"만약 선생님이 한 해 동안 여러분과 생활하면서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라도 그 공책에 적힌 것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께 약속한 사실을 상기하고 다시금 친절한 교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는 교사가 되겠다는 약속도 합니다. 제 전공과목인 영어는 물론이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약속을 먼저 한 뒤에 아이들에게도 제게 두 가지만 약속을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하나는 절대로 영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나의 약속'이라고 써서 제가 아이들에게 한 '선생님의 약속'과 함께 나란히 공책에 적게 합니다.

이러한 일종의 친절 서약은 어쩌면 아이들 스스로의 약속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두어 가지 이유가 더 있긴 합니다. 아이들이 장차 남에게 친절한 인간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제가 먼저 모범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한 구석에는 저를 포함한 우리 교사들이 그 동안 아이들에게 너무 불친절하지 않았나 하는 교사로서의 자기 반성이 섞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친절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한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엄하다는 말과 불친절이라는 말을 동의어로 해석하는 경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친절한 교사는 아이들에게 엄하지 않고 물렁한 교사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사실, 교사의 불친절은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학급당 학생수가 많이 줄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후진국 수준에서 맴돌고 있고, 요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0교시 수업이나 불법 보충수업을 학교 당국이 막무가내로 밀고나가면 교사는 어쩔 수없이 아이들에게 불친절한 교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불친절의 악순환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아이들 앞에서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은 이러한 불친절의 고리 속에 어쩔 수 없이 제가 끼어있다는 자각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아이들에게 불친절한 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 저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방어책을 세우게 한 셈입니다. 불친절의 사슬 맨 마지막엔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이유 말고, 제가 해마다 아이들 앞에서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제가 맨 처음 교단을 밟았던 초임교사 시절로 잠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어쩌다가 서른 네 살의 나이로 어렵사리 첫 교단을 밟은 저로서는 매일 매일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즐겁기만 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 만나는 일이 시큰둥해졌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가 실업계이다 보니 아이들의 영어 기초가 턱없이 부족하여 제가 아이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요리가 번번이 아무 쓸모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리고 만 까닭이었습니다.

영어 기초가 부족하고 거기에 학업에 대한 열의마저 보이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저는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제가 만든 최고급 생과자를 탐낼 수 있는 제자가 그립기만 했습니다. 영어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교육적인 열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저와 함께 시와 인생을 논할 제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아이들이 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이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쓰레기장 근처에서 아이들과 함께 청소를 하다가 신이 저를 위해 마련해주신 한 장면과 마주치게 됩니다. 한 아이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아주 작은, 눈곱만큼이나 작은, 너무도 작아서 꽃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작은,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꽃을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았습니다.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그 작고 소박한 풀꽃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해보였습니다. 그 풀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그만의 가치로 그만의 생명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작게 핀 꽃

청소시간
쓰레기 텃밭 잡초 뽑는 아이들
바짓가랑이 사이로
작디작은 꽃
반딧불만한 노란 풀꽃을 본다

작아서 더 단정한 꽃받침
설핏 핀 노란 웃음
제 향기 제 빛깔로
제 키만큼만 커서 서 있다

꿈을 파묻지 않는 미덕을
어디서 배웠을까
온 평생을 이기어온 고독으로
작아도 작지 않은 꽃
작지 않았던들
이렇게나 고왔을까

지금 바라보고 있을까?
두어 마지기 비탈 논에
녹슨 바다가 전부인
제 아버지를 닮은
키가 작은 우리 아이들

꿈은 먼 데 있어
딸 수 없다고
작은 키를 더
움츠리고나 있지 않을까

작아서 더 아름다운 꿈
작게 자라 머리 위로
푸른 창공을 넓히는
작아서 더 큰 꽃을
우리 아이들도 바라보고 있을까

쓰레기 텃밭 잡초 뽑는 아이들
바짓가랑이 사이로
작디작은 꽃
반딧불 만한 노란 풀꽃을 본다
아이들의 노란 웃음소리를 듣는다.

-졸시, '작게 핀 꽃'

저는 올해도 어김없이 아이들 앞에서 친절 서약을 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을 배려하기보다는 제 자신을 위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들은 그 생명 앞에 겸손하고 친절한 자세로 다가가는 자에게만 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사의 참된 보람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공책 정리를 하지 않고 있기에 가볍게 나무라며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전 영어 하나도 모릅니다. 적어봤자 뭐합니까?"
저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르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정말 영어를 하나도 모를까?"

그렇게 말하고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단어를 적어나갔습니다.

love, heart, home, I, mother, god

그리고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중에서 모르는 단어가 있니?"
"그런 건 다 압니다. 하지만…"
"왜, 너무 쉬운 단어라는 거야?"
"예."
"너는 사랑이 쉽니?"

"예?"
"네 가슴속에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니? 그리고 너의 집과 네 자신과 집에 계시는 너의 엄마가 아무 것도 아니니? 넌 엄청난 영어를 알고 있는 거야. 너는 하나님도 알고 있잖아."
"에이, 선생님 그건 말도 안 돼요."

그 아이의 말대로 저는 그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일로 해서 그 아이와 저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수업 시간, 그의 표정을 보니 그는 분명히 영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교사의 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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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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